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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후반부로 치닫고 있는 2013년이다. 그렇지만 아는가. 모든 사람들이 2013년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필요는 없다. 주변을 살펴보라. 아직도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지 않은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유신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2013년을 조선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존여비와 경로사상으로 무장하고 있을 것이다. 또 2013년을 일제강점기로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혼마치(本町)의 퇴폐적이고 냉소적인 소비문화를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2013년을 유신시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자의 눈치만 보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 하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도, 일제강점기도, 그리고 유신시대도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이렇게 유령처럼 발호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유령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아들이 불행히도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하자. 불행 중 다행이랄까, 비행기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로 추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의 시신을 발견한 경우와 시신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 중 어느 것이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골적으로 물어보자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 소식과 실종 소식 중 어느 것이 더 소망스러운 것일까. 순간적이나마 사랑하는 사람의 실종이 그의 사망보다 더 소망스러운 일이라고 대답할 가능성이 있다. 실종된 사람은 살아서 돌아올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다는 짧은 생각에서다.


새누리당 군사쿠테타 미화하지 마라 (출처 : 경향DB)


그렇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우리는 사망 소식보다 실종 소식이 남아있는 가족에게 더 큰 상처와 슬픔을 남겨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행기 사고가 2003년에 일어났다고 가정하자. 사망 소식을 접한 당시에 나머지 가족들은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상처가 그렇듯이, 정신적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비록 깊은 흉터는 남기겠지만 아물어가기 마련이다. 당연히 10년이 지난 2013년쯤 유족들은 나름대로 안정을 찾게 될 것이다. 반면 실종 소식은 유족들에게 사망 소식보다 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실종 소식을 접한 유족들이 결코 이사를 갈 수 없게 되리라는 점이다. 실종자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족들은 실종된 아들의 방마저도 그대로 유지하려 할 것이다. 언제든지 아들이 돌아오면 써야 되니, 청소도 매일 말끔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2003년에 실종된 아들은 2013년이 되었음에도 조금도 나이도 먹지 않은 채 남은 유족들과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유령이 탄생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남은 유족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개입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유령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동서양을 구분할 것도 없이 인류가 그렇게도 장례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장례 행사는 고인을 두 번 죽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고인의 죽음이 첫 번째의 죽음이라면, 유족의 마음에 남은 고인마저 떠나보내는 장례 행사는 고인에게 두 번째 죽음을 선고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마음에서 고인을 영영 떠나보내는 두 번째 죽음이 아닐까. 그래서 장례는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하는 절차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단을 마련하고 향을 지피고 조문객을 받으며 맞절을 하는 것은 마음에 남아 있는 고인을 떠나보내려는 유족들의 처절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출처 :경향DB)

▲ “과거를 제대로 청산 못해

우리 주변에 가득 찬 유령들을

무덤으로 돌려 보낼 퇴마사가 필요”


비행기 사고로 실종된 아들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첫 번째 죽음이 완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들의 시신을 확인할 수 없으니, 유족들은 장례를 치를 수가 없다. 언제든지 문을 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아들의 실종 소식은 고인의 두 번째 죽음을 영원히 유보하도록 만드는 참담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아들과 함께 사는 꼴이니, 영락없이 유령과 함께하는 세월이 시작된 셈이다. 이제 남은 유족들은 2003년 실종 사고가 있던 그 날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족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여행을 갈 수도 없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수도 없고, 맛난 것을 편안하게 먹을 수도 없다. 유족들에게 2004년도, 2005년도, 그리고 2013년도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삶은 실종 사고와 함께 방부 처리된 미라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하긴 유령과 함께 사니 어떻게 유족들의 표정이 잿빛을 띠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유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남존여비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조선시대의 유령이, 식민지 지식인의 냉소적 지성을 낳았던 일제강점기의 유령이, 그리고 전태일과 장준하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유신시대의 유령이 우리 주변 도처에서 배회하며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조선시대는, 일제강점기는, 그리고 유신시대는 이미 지나간 시대이고, 죽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 가지 소홀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유신시대에 대한 장례식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치를 수 없는 실종자는 유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나간 시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우리는 장례식을 이미 치렀다. 그럼에도 2013년 오늘 유령들처럼 과거 시대의 망령들이 우리의 삶을 잿빛으로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례식을 부정하면서 죽은 시대를 실종된 시대로 만들려는 세력들이 발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묘살이 시작한 고 장준하 선생 장남 호권씨 (출처 :경향DB)


과거 망령들을 불러내는 어두운 세력들이 장례식을 치른 적이 없다고 설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미풍양속은 죽지 않았다고,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죽지 않았다고, 유신시대의 개발독재는 아직 살아있다고, 그들은 앞다투어 주문을 외우고 있다. 이미 죽은 것들을 그들은 실종된 것들로 만들려는 것이다. 유령을 불러내는 그들의 주문은 효과가 있었나보다. 도처에 그들이 불러낸 유령들에 씌인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니 말이다. 역차별을 운운하며 과거 남존여비로 회귀하려는 사람들, 일제강점기가 우리를 개화시켰다며 자본주의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 유신시대 개발독재의 참담함을 경제적 풍요로 퉁치려는 사람들. 돌아보라. 정계, 학계, 재계, 그리고 언론계는 이미 유령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우리는 2013년을 떠돌고 있는 유령들을 다시 무덤으로 되돌려 보내는 퇴마사가 되어야만 한다. 이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 누구도 2013년을 살아낼 수도, 그리고 2014년을 맞이할 수도 없을 테니까.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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