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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가본 적이 있는가. 이곳을 방문한 누구라도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유혹에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조선시대 왕릉을 압도하는 규모에 놀라 부러움도 피력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집트가 너무 멀다면, 가까운 중국에라도 가본 적은 있는가. 중국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만리장성에 발을 디디게 될 것이다. 끝도 없이 산을 따라 펼쳐진 만리장성을 보면서 중국 문명의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되어 북한산에 남아 있는 산성이 초라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해외에 나갈 여유가 없다면, 서울 경복궁에라도 들러 보라. 엄청난 규모의 궁궐이 위엄을 뽐내고 서 있을 것이다. 피라미드도 만리장성도 그리고 경복궁의 웅장함에 매료되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그렇다. 우리는 지배자의 시선으로 피라미드나 만리장성, 혹은 경복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번이라도 깊게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피라미드를 만들려고 무거운 돌을 나르며 피땀을 흘리는 노예들의 모습, 만리장성을 만드는 데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에 지쳐 쓰러져갔던 수십만의 사람들, 혹은 농사를 접고 강제로 경복궁 창건과 복원에 동원되었던 우리 조상들. 그 참담한 장면이 떠오르는가. 이것이 떠오를 때, 우리는 마침내 인문주의적으로 역사를 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피라미드, 만리장성, 그리고 경복궁을 배경으로 V자를 그으며 해맑은 얼굴로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피라미드의 기단부, 만리장성의 성벽, 그리고 경복궁의 외벽에서 과거 억압받던 사람들의 고통의 단말마가 울리는데, 어떻게 순진한 관광객으로 머물 수 있다는 말인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 그리고 문화의 기록 자체가 야만성을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전승의 과정 역시 야만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시대 가장 탁월한 지성 발터 벤야민의 말이다. 그렇다. 피라미드도 야만이고, 만리장성도 야만이고, 경복궁도 야만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한 모든 기록, 역사도 야만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당연한 일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지 않던 피땀과 유골을 토대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건축물을 역사의 위대한 유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전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야만이 아닐 수 있는가. 아니 기만이라고 해도 좋을 일이다. 역사가의 선전에 속아 거대한 건축물에 경의를 바칠 때, 우리는 자신도 괴로운 피땀을 흘려야 하는 운명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야만을 문명으로 포장하는 역사가를 경계하자. 그들의 기만에 속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참혹했던 것인지 망각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이런 핏빛으로 점철되고 단말마의 미명이 음습하게 울리는 유물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이럴 때 드디어 지구상에는 황제와 파라오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파라오나 황제가 지배하는 왕조시대가 아니라고 반문하지는 말자. 단지 지금은 그런 인격적 지배자가 아니라 인격성을 넘어서는 더 강한 지배자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무서움이다. 전자본주의 시대나 자본주의 시대가 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사례 하나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 동원된 노예들 중 어느 누구도 화려한 피라미드에서 안식에 들지 못했다. 그곳은 오직 파라오만이 쉴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화려한 주상복합건물을 만든 노동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그곳에 거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돈을 많이 가진 사람만이 아무런 수고도 없이 그곳에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채찍질이란 직접적인 폭력만이 억압일 수는 없다. 사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든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이 더 야비하고 기만적인 억압일 수도 있으니까.

 

일러스트 김상민

▲ 피라미드·만리장성·유신독재…
웅장함 뒤에 가려진 피와 땀
문명으로 포장된 야만에 경계를

물론 전자본주의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전자에서의 복종이 ‘강제적 복종’이었다면 후자에서의 복종은 ‘자발적 복종’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복종’에서 ‘자발’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 우리 시대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착시효과가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과거 사회가 폭력적일 수는 있었어도 더 정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예는 항상 도망갈 궁리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이미 길들여진 우리는 도망갈 궁리는커녕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될지를 더 고민하고 있다. 채찍질이 없으면 태업을 하던 노예들, 그리고 해고될까봐 야근도 서슴지 않는 우리들.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상황인지.

지금은 피라미드에서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을 보고 거대한 빌딩에서 만리장성을 읽어낼 감수성이 필요한 시대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선조들과 우리의 동료들의 피땀과 굴욕을 읽어내야만 한다. 벤야민이 역사철학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술회하면서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본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니 더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피라미드, 만리장성, 그리고 경복궁을 이루는 돌들을 아주 세게 손바닥으로 쓸면서 그 거대한 건축물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마찰 때문에 손바닥이 얼얼하고 심지어는 진물이 생기고 마침내 피가 흐를 때, 우리는 지금껏 인간이 겪었던 오욕의 역사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역사, 그러니까 자유와 정의를 긍정하는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지금 치열하게 전개되는 우리의 역사 교과서 논쟁을 보았다면 벤야민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분명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장탄사를 내뱉었을 것이다. 팩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논쟁의 핵심일 수는 없다. 억압이 존재했던 시대에 그것이 왕조이든 독재이든 혹은 자본에 의해서든 팩트란 어차피 지배의 흔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논쟁은 역사관의 논쟁일 수밖에 없다. 일체의 부당한 억압과 지배를 부정하며 민주주의를 꿈꾸는 인문주의적 시선의 역사관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타율적이든 자발적이든 거대한 동원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화려한 역사적 팩트들을 긍정하면서 승자에게 손을 들어주는 역사관을 가질 것인가. 전자가 바로 진보적 역사관이라면 바로 후자가 보수적 역사관이다.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일제 강점기나 혹은 유신시절에 아무리 세련된 문물들이 범람했을지라도 심지어 그것들이 그 시절 유물의 99%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해야만 한다”. 그 모든 세련된 문물들은 결국 제국주의를 위해, 혹은 독재자를 위해, 아니면 자본주의를 위해 바쳐진 기념비일 테니까 말이다. 피라미드에서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대 건축물이 인류의 유산이라는 장밋빛 주장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나 유신 시절의 모든 자본주의적 산물들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인간들의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 피비린내를 희석시키려는 보수적인 역사관이 지금 심각할 정도로 발호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설 <1984>에서 조지 오웰도 우리에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고.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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