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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추석에 고향을 찾는 것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조상들이 찾아오는 날이 따로 있듯이 찾아오는 곳도 따로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석처럼 특별한 날은 몸 둔 곳과 고향만 연결시키는 게 아니라 이 세상과 조금 다른 세상을 생각하게도 한다. 물론 요즘에는 그 다른 세상의 기운이 많이 엷어져서 고향의 부모가 타지에 사는 자식을 찾아와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제사에 귀신을 부르는 여러 절차와 함께 축문을 읽는 일도 생략하고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왜 축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게 진짜 글이라서 그렇다고 어른들은 대답했다. 나는 어른들의 말을 믿었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진짜 말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말과 관련된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처지에서, 내가 그 생각을 지금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생각은 말에 대한 지금의 내 생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어른들이 한문을 진정한 말이라고 했던 것은 반드시 언어 사대주의에만 그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에 얽혀 있는 역사적 맥락을 제쳐 놓고 생각한다면, 축문에 쓰인 한문의 힘은 상당 부분 그것이 낯선 언어이며 일상적으로 소통 불가능한 언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축문은 본질적으로 귀신세계에 말걸기이고, 거기에 사용되는 말은 일상어와 일정한 격차를 지님으로써 특별한 위엄을 띠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문은 말이면서 동시에 일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잃은 말이 아니기에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락한다는 그 기이한 소통을 감당할 수 있다고도 보아야 한다. 이런 생각은 일부의 감각기관에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는 생각과도 통한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리는 ‘밥’을 ‘밥’이라고 부르지만, 꼭 그렇게 불러야 할 이유는 없다. 솥이라, 똘이라 불릴 수도 있던 것이 우연히 ‘밥’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언어학에서는 언어가 자의적이라고 한다. 이런 사정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어떤 언어도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언어는 아니다. 한국어는 한국의 방언이고, 중어와 일어는 각기 중국과 일본의 방언일 뿐이다. 그런데 귀신의 세계에 말을 걸려면, 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축문을 한문으로 쓴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초월한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이 일상적 언어의 방언성을 넘어서려는 최대한의 노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말라르메 같은 사람이 리듬은 낭랑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시를 썼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시의 언어는 어떤 보편적 성격을 지닌 것처럼 들린다. 한문으로 된 축문이 보편적 언어같이 들렸던 것처럼.

어느 언어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제멋대로 만들어진 임시 언어일 뿐이다. 어쩌면 인류가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사고의 허약함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나무’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나무여야 할 텐데, 그 나무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말을 우리는 멋대로 만들어서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진리가 보편적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말도 보편적이어야 할 텐데, 말에 관한 한 인간은 우연에 우연을 겹쳐놓고 있을 뿐이다.


영어공용화 한국외국어대 학술대회_경향DB


벌써 10년도 더 전에 영어공용화론이 등장해 적잖은 풍파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제는 그런 주장을 공공연히 들고 나오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주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영어공용화론은 어쩌면 그 시행에 앞선 절차를 암암리에 밟아가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주장 이후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여러 대학에서는 영어 강의의 비율을 높이는 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런저런 인사들은 반세기 안에 세계 만국의 언어가 영어로 통일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고 말하며 바람을 잡고 있다. 그런데 모든 언어가 영어로 통일되고 모든 나라가 제 말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그때 영어는 보편적 언어로서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언어 통일이 실현된다면 낯선 외국인을 만나도 소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학생들은 외국어를 따로 배우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더 잘 이해할 것이기에 세계는 그만큼 더 평화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 말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해 본 사람들의 의견은 다르다. 말라르메는 인간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언어와 언어 사이를 헤맨 사람들은 거꾸로 인간이 언어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여러 개의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서로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언어는 ‘눈’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낱말로 ‘함박눈’에 해당하는 말을 가진 언어는 많지 않다. 한 언어가 적시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언어는 적시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산이라 부르고 어떤 것을 들이라 부르고, 그렇게 말로 분별되는 세계는 그 분별하는 말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다. 말에는 그렇게 부르기로 하는 정식계약과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부르기로 양보하는 이면계약이 있다. 언어는 통일될 수 있어도 이 이면계약은 통일되지 않는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것이 다른 부류에게는 불확실한 것이 되며, 어떤 언어로는 절실한 진실에 다른 언어는 관심조차 없다. 언어가 서로 만날 때 이 불확실한 것들이 솟아올라와 산과 들을, 사랑과 증오를 새롭게 고찰하고 새롭게 정의하게 한다.

진리는 늘 새로운 내용을 얻는다. 그래서 한 언어의 관점에서 다른 언어는 제가 표현하지 못하는 숨은 진실을 쌓아놓은 저장고와 같다. 그래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언어를 지키고 가꾼다는 것은 그들만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의무가 된다. 우리가 추석에 고향에 가는 것은 우리의 언어가 닿지 못한 진실을 체험하기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귀신은 어떤 언어에도 감응하지 않는다. 숨은 진실로 거기 있을 뿐이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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