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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청춘 마리안느>는 1955년에 출시된 쥘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영화다. 원제(Marianne de ma jeunesse)를 그대로 번역했더라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내 청춘의 마리안느’나 ‘내 젊은 날의 마리안느’ 정도의 말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저 ‘의역’에 관해 말한다면, 당시 조사 ‘의’의 용법이 오늘날처럼 다양하지 않았던 탓도 있겠으나 ‘의’로 연결된 두 명사보다 나란히 놓인 두 명사가 더 멋있어 보였던 시대적 감각의 힘도 크겠다.

그러나 ‘내 청춘’이 아닌 ‘나의 청춘’에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강력했을 일본어의 영향을 제쳐 둔다면, ‘마리안느’와 ‘청춘’ 사이의 생략된 ‘의’에 대한 아쉬움도 어느 정도 개입했을 듯싶다. 아무튼 이 영화는 내용보다 먼저 제목으로 이 땅의 청춘들을 오랫동안 설레게 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국어교사이기도 했던 한 시인은 ‘청춘’이 들어간 말 가운데 저속하지 않은 것은 ‘나의 청춘 마리안느’뿐이라고 단언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제하 선생의 대학로 카페 ‘마리안느’도 그 이름을 이 영화에서 빚졌을 것이다.

바바리아의 호숫가에 자리 잡은 귀족 기숙사 학교의 생도인 뱅상은 매혹적인 청년이다. 이국적인 노래를 기타 반주에 실어 애조 띤 목소리로 부르며, 특별한 마력을 행사하여 짐승들을 수족처럼 부릴 줄 안다. 그는 호수 건너편 비어 있는 고성을 탐색하던 중, 어느 늙은이와 강제 결혼하여 그 성에 갇혀 있는 처녀 마리안느를 만나게 된다. 뱅상은 마리안느를 탈출시키려 했으나 거인 경비원의 폭력에 쓰러지고 만다. 그는 개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학우들의 도움으로 깨어났다. 그는 마리안느를 구하기 위해 학우들과 함께 다시 성으로 들어갔으나 사람들은 사라졌으며, 마리안느였던 처녀의 낡은 초상화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뱅상은 제 젊은 날의 사랑인 마리안느를 다시 만나기 위해 기숙학교를 떠난다. 필요하다면 세계의 끝까지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를 만나야만 살아갈 의욕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청춘을 훌쩍 넘긴 40대 중반에야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너무 늦게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악일 때도 있다. 음식은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 영화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부풀어 오른 기대를 낡은 영화는 채워주지 못했다. 주인공 뱅상 역을 맡은 피에르 바넥이 학우들에 비해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는 느낌도 내내 영화에 집중하려는 노력을 방해했다. 그리고 또 다른 훼방꾼이 있었다. 알랭 푸르니에의 <대장 몬느>를 나는 이미 읽었던 것이다. 푸르니에의 소설은 영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지녔고 같은 발상법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훨씬 더 세련되고, 조직이 더 복잡하고, 스케일이 더 클 뿐만 아니라 영화보다 무려 40여년 전에 출간되었다. (뒤늦게 출발하여 여전히 초창기에 있는 영화가 발전의 정점을 넘긴 소설을 따라잡기는 힘든 일이다.)

영화에 흥미로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기숙학교의 뱅상이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의 첫 시인이자 가수로 소개되는 오르페우스의 현대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무슨 큰 발견이나 한 것처럼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오르페우스의 리라는 뱅상의 기타가 되었다. 동물들은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춤을 추듯 뱅상에게 복종한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유리디스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가고, 뱅상은 호수 건너편의 고성에서 영혼의 약혼자 마리안느를 만난다. 그 둘은 모두 여자의 구조에 실패한다. 물론 이런 비교는 문화적 호기심을 잠시 충족시킬 뿐 어떤 감명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선배들과 영화의 주인공이 공유했을 마음의 자리를 알아맞힐 수는 있었고, 선배들을 감동하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


<나의 청춘 마리안느>는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 속에서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이 합작으로 만든 영화다.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끔찍한 살육의 벌판으로 인간들을 내몰았던 나쁜 이념에 대한 저주와 반성이 있다. 주인공 뱅상이 정신의 약혼자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할 ‘세상의 끝’은 국가주의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이념들과 제도들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다. 뱅상이 이 세상 밖의 여자, 그래서 순결한 여자 마리안느를 만나러 떠날 때 그는 제 정신이 제도와 이념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가장 먼저 거부하는 것이 학교 교육이다. 학교는 제 나라 땅에서도 자주 식민의 집행부가 된다. 학교는 새로운 앎을 개발하기 이전에 젊은 정신을 국가와 사회의 이념에 먼저 묶으려 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가장 큰 불행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들이 제 운명을 제 뜻대로 기획하고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저를 제 뜻대로 성장시킬 수 없으며, 제가 살아야 할 사회를 제가 기획하지 못하며, 제 나라를 제가 건설하지 못한다. 그가 제 자신을 사회에서 따로 떼어 말하려 한다면 그 시도 자체가 반역이다. 몽매할 뿐이기에 계몽되어야 할 인간이 제 인격을 말한다는 것은 사회에 짐을 지우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국가를 위해서만 존재할 때, 그 나라는 비록 독립국이라도 식민지와 다를 것이 없다.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미래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목표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지식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을, 인간 정신의 정상과 비정상을 이제 국가가 결정하려 한다. 젊은 정신들을 국가주의의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 여기에는 ‘나의 청춘’도 ‘마리안느’도 없다. ‘나의 청춘’은 앎을 향한 순결하고 열정적인 주체이며 ‘마리안느’는 그 열정을 보장하는 자유이다.

사족을 붙인다. ‘마리안느’는 현행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자면 ‘마리안’으로 써야 한다. ‘내 청춘 마리안느’는 외래어표기법이 유동상태에 있을 때 만들어진 말이다. 내게 ‘마리안’을 ‘마리안느’로 쓰도록 허락해주는 ‘내 청춘 마리안느’는 국가적 언어정책의 추상같은 의지를 잠시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해방구와 같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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