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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거니와 나는 ‘노빠’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했다. 반칙 없이 사람 사는 세상. 탈권위의 공정한 사회.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나는 도시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공정한 사회는 옳으나 공평한 국토는 좀 다른 이야기였다.

도시는 교환의 경제성을 무기로 존재하는 장치다. 공정하고 능률적인 교환이 도시의 경쟁력이다. 좁은 땅에 모여 사는 것이 도시의 가치다. 그래야 자원도 시간도 절약된다.

그러나 그 정부는 도시의 근본을 부정했다. 균형발전의 기치 아래 도시의 여기저기를 잘라 논밭에 던졌다. 그것이 혁신도시고 행복도시다.

조성된 도시가 국토의 균형발전에 이바지했을 수 있다. 시가지로 변한 논밭의 땅값도, 이주된 공공기관 옆 식당의 매상도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도시가 작동하기 위해 엄청난 교통 부하가 발생했다. 균형발전은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국토 이용의 동의어였다. 그렇게 길 위에 뿌리는 자원과 시간이 균형발전의 대가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흔적은 심화된 사회불평등의 지표로 뚜렷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서울시가 보행중심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그의 시장 재임기였다.

그는 청계천 복원이라는 초대형 공약을 걸고 시장에 당선되었다. 천정부지의 아파트값이 진정된 것도 그의 대통령 재임기였다. 금융위기의 결과였을 수도 있고 그린벨트도 훼손되었지만 어쨌든 집값은 잡혔다.

역시 거기까지였다. 그는 한반도 대운하를 공약했다. 있는 강을 트고 묶어 만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운하가 반도를 횡단하는 게 아니고 종단했다. 황당한 논리였다. 진행도 포기도 어렵던 공약은 슬며시 4대강 사업으로 바뀌었다. 황당한 전이였다. 생명의 강 살리기라는 거대한 광고판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생명의 자연을 무참하게 걷어내는 불도저의 야만을 나는 또 보았다.

필요하면 짓고 필요 없으면 철거한다는 이분법의 시대였다. 존치와 철거 사이를 보는 상상력은 없었다. 청계고가가 철거되었고 세운상가도 철거하겠다고 했다. 퇴적된 도시 흔적이 뉴타운의 간판 아래 깨끗이 사라졌다. 은행과 건설사가 떼돈을 벌었고 시민의 주거결정권이 부인되었다.

그럼에도 믿어야 했다. 끝내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고 있으리라고. 종종 돌아가는 길에 접어들더라도 끝내 한길에서 만날 것이다. 이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다. 도시를 갈아엎지 말고 조금씩 손봐서 바꾸자고 한다. 세운상가도 철거하지 말고 고쳐서 쓰자고 한다. 존치와 철거 사이를 메울 수 있는 상상력이었다.

서울역고가가 바뀌었다. 안전진단이 철거를 요구했으니 철거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보행자 공간으로 바뀌었다. 도시 변화 증언의 기념비로 남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더 필요하다. 나무도 더 자라고 꽃도 더 피어야 한다. 때도 묻어야 한다. 그러나 헐지 말고 고쳐서 쓰자는 이 방향은 분명 옳다.

도심은 보행자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통 문제를 내걸고 반대하는 자는 비난해야 한다. 도시의 공공영역은 배타적으로 소유하거나 이용하면 안된다. 그러나 기존의 도시는 공평하지 않았다. 부유한 자들이 더 많은 공공영역을 향유했다. 그 대표적 공간이 도로고 그 주체가 기어이 도심에 진입하는 자동차다.

자동차는 모셔두려는 게 아니고 도로를 이용하려고 구입한다. 자동차의 공공영역 사용 대가는 유류세로 징수되어 왔다. 유류세가 정당한 것은 자동차가 운행과정에서 배타적으로 도시 공공영역을 점유하기 때문이다. 많이 쓰면 많이 내는 합리적 체계다. 이제 석유자동차를 전기자동차로 바꾸자고 한다. 화석연료 불사르는 엔진의 시대가 지나가야 한다는 데 나도 동의한다.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기차 구매자에게 보조금 지급하고 세금 감면하고 주차장 이용료 면제해준다고 한다. 보조금은 세금에서 지급한다. 이미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자동차 제조업체의 미래를 위해 왜 국민의 혈세가 지원되어야 하는지 의아하다.

전기자동차 보급으로 유류세도 사라지고 자동차의 도로 점용에 대해 강제할 정의가 사라진다. 보행자들은 납세자로서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는다. 환경의 간판을 내건 전기차 장려가 그래서 걱정스럽다. 그것이 초래할 도시 불평등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도시 불평등은 사회 불평등에서 시작된다. 자동차가 들어온 것도, 근대식 도시계획이 시행된 것도 일제강점기다. 그 도시계획은 도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국 사람이 아닌 자동차를 위한 것이었다. 민초를 위한 도시일 수가 없었다.

도시는 하루 만에 바뀌지 않는다. 도로를 인도와 차도로 나눈 이분법에서 여전히 차로는 지배자들의 질주를 위해 비워둔 상태다. 차도는 광활하되 인도는 항상 가장 인색한 폭으로 조성된다. 도로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은 모두 약자의 공간, 그 좁은 인도에 쓸어 넣는다. 신호등, 가로등, 전신주, 가로수, 변압기가 모두 인도 위에 올라가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위에 오토바이가 질주하고 자동차가 올라선다. 200마력의 기계를 앞세운 자가 0.1마력 보행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도시는 공정하지 않다.

폭설기를 생각해보자. 안전한 자동차 운행을 위해 세금으로 구매한 염화칼슘을 밤새 차도에 뿌린다. 그러나 집 앞 눈은 알아서 치우라고 한다. 그래서 눈 치울 사람이 없는 인도는 방치돼 빙판이 된다. 낙상사고는 넘어진 너의 책임이다. 여전히 우리는 그런 도시에 살고 있다. 기회가 공평하지 않고 과정이 공정하지 않으며 결과도 정의롭지 않은 도시.

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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