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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취임 3일째를 맞이한 문재인 대통령은 ‘상식과 정의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역사교육 정상화’를 위해 중등의 국정 역사교과서를 폐지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2018년부터 적용할 예정인 국·검정 혼용체제를 검정체제로 즉각 전환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에 따라 교육부도 검정체제로 전환한다는 재수정 고시를 16일자로 행정예고하였다. 몇 년 동안 한국사회를 편 가르고 적대감을 증폭시킨 국정화 갈등이 마침내 종결된 것이다.

그런데 16일자 교육부의 ‘즉시 보도자료’에는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검정체제로의 전환만을 말하고, 2015교육과정에 따라 오는 8월3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의 심사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다. 12일자 청와대 업무지시에는 ‘검정 교과서의 집필기간 확보를 위해 현행 2015교육과정 적용시기 변경을 위한 수정고시 등’을 이행하라고 나와 있는 데도 말이다.

교육부는 언론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컨트롤타워가 부재해서, 또는 청와대와 소통이 어려워서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심지어 출판사로부터의 소송을 걱정한단다. 언론에서는 교육부가 진퇴양난에 처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교육부도 언론도 국정제를 폐지함에도 불구하고 2015교육과정을 지속해야 하는 명분이나, 폐기해야 하는 이유를 교육과정과 연관해 설명하고 있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지시하는 전자결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래서 기억을 되짚어보자. 2015교육과정은 역사학계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국정 역사교과서를 제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회적 반발과 ‘효도 교과서’ 제작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박근혜 정부는 2016년 12월 이 교육과정의 적용 시기를 1년 연장하여 2018년부터 적용하겠다고 결정하였다. 동시에 교육과정의 구성과 집필기준은 바꾸지 않은 채 국정체제를 국·검정 혼용체제로 전환한다고 발표하였다. 따라서 검정체제라는 이름으로 8월까지 제출해야 하는 심사본은 검정으로 위장한 여러 버전의 예비 국정교과서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학자 다수가 2015교육과정을 반대한 이유는 전체 구성과 집필기준과도 연관이 있다. 2015교육과정은 중·고교 역사교육의 계열성을 무시한 채 시대별 생활문화사를 뺐거나 조금만 집필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중·고교 모두 지나치게 정치사 중심이다. 그렇다고 정치와 지역, 세계를 연관시켜 설명하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지도 않다. 폐기된 국정교과서가 증명했듯이, 세계와의 연관은 말 그대로 장식품처럼 처리되어도 무방한 구성이다. 내용 요소를 그대로 둔 채 분량을 100쪽 정도 축소해 제작하도록 하고 있으니 한국사를 서술하기도 벅찬 것이다. 근현대사보다 전근대사를 더 많이 쓰도록 유도하고 있어 역사교육의 세계적인 추세와 반대로 가고 있는 점도 큰 문제다.

우선 당장은 대통령의 지시처럼 적용 시기를 바꾸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국정체제를 폐지하고 검정체제로 전환한다는 취지에 부합한다. 이는 컨트롤타워의 부재도, 소통의 어려움 문제도 아니다. 교육부 관료들이 대통령의 업무지시를 진정으로 납득했다면 16일자 수정 고시에 반영했거나, 그러한 의지를 밝혔어야 할 사항이다.

장기적으로는 역사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며 미래가치를 담아낼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교육과정평가원에서 교과서 검정 업무를 떼어내는 한편, 인사와 예산이 독립된 교과서 관련 정책기구 또는 시민정치교육을 전담할 기구를 만드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4~5년 간격으로 교과서 검정을 실시한다는 전제를 두고, 교육연한에 맞추어 교육과정을 10년 내지는 12년마다 개정하는 주기성을 제도화할 필요도 있다.

이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 논리에 따라 교육과정을 개정하고 교과서를 제작하는 ‘적폐’가 제발 없어졌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도 별로 바뀌지도 않은 교육과정에 맞추느라 3년 만에 교과서를 완전히 다시 쓴 황당한 경험을 또 하고 싶지 않다.

신주백 | 연세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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