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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 앉아 여름비를 본다


발밑이 하얀

뿌리 끝이 하얀

대파 같은 여름비


빗속에 들어

초록의 빗줄기를 씻어 묶는다


대파 한단

열무 한단

부추, 시금치 한단 같은


그리움 한단


그저 어림잡아 묶어놓은

내 손 한묶음의

크기


고영민(196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박용래 시인은 억수 같은 장대비의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그 속에는 누군가 자신을 목놓아 부르는 소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장대비 빗줄기를 “상아(象牙)빛 채찍”이라고 해 영혼의 고독과 불안과 통증을 표현했다. 

이 시에서는 여름비를 대파의 하얀 뿌리 같다고 썼다. 여름비를 보면서 대파며 열무며 부추며 시금치 한단을 묶는 것을 상상한다. 기른 것의 싱싱한 한단을 묶는 일을 상상한다. 또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싱그러운 생각도 한다. 

이 시의 특별한 매력은 풍경을 바깥에 서서 평면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풍경의 공간 내부로 한걸음 들어간 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빗속으로 들어가 빗줄기를 한묶음씩 묶는 상상을 함으로써 그 풍경은 사건적 풍경으로 거듭난다. 하나의 풍경에 노동과 삶의 기억이 개입하는 순간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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