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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간 엄마는 잘 안 오시는 것이다 우리 엄마 안 오시네 엄마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배추를 팔아 신발을 사 오실 엄마


엄마는 신발을 잊고 엄마는 빨랫비누만 소금 됫박이나 사 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좋은 날이란 신발은 오지 않고 좋은 날만 따라왔던 것이다


언 발로 사위를 찍고 사라진 고라니의 겨울 산정도 신발처럼 저 너머에 솟아 있었던 것이다 고라니는 떠나가고 좋은 날은 혼자 남아 기다렸던 것이다 고라니도 신발을 깜빡했다고 들켜주었던 것이다 엄마처럼


좋은 날은 어디선가 제 신발을 찾아 신고 오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정윤천(1960~)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엄마는 장에 가시고,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엄마는 배추를 팔러 장에 가시고, 장에 간 엄마가 새 신발을 사서 오시길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그러나 엄마는 빨랫비누와 소금만을 사서 돌아오시고, 아이의 신발을 사서 오시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잊으신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생필품만을 살 수밖에 없으셨겠지만.) 아이는 응석을 부리며 엉엉대며 울었을 것이다. 엄마는 다음 장날에는 꼭 신발을 사다 주겠노라고 달랬을 것이다. 흰 종이 위에 아이의 작은 발을 올려놓고 본을 떠서 가겠노라고 엄마는 약속을 했을 것이다. 아이는 겨울 산꼭대기 하얀 눈밭에 찍혀 있는 고라니의 신발 없는, 맨발의 발자국과 고라니의 언 발을 생각한다. 언젠가 좋은 날이 새 신발을 신고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젊은 엄마가 계셨던 옛 시간과 백설(白雪)이 깨끗하게 눈부시던 높은 산정(山頂)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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