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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셀프’ 전역사

opinionX 2019. 5. 3. 10:12

1988년 초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을 준비하던 관계자들은 전두환 대통령의 뜻밖의 요구에 경악했다. 물러나는 전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과 동등하게 예우받는 ‘이·취임식’을 하자고 고집했던 것이다. “전례가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요지부동, 떠나는 대통령도 당당히 한마디 해야 한다고 우겨댔다고 한다. 이 발상은 당연히 무산되었다. 그리고 취임식 준비팀은 나중에 군의 이·취임식 문화에 대해 듣고서야 전 전 대통령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였다. 

군이 지휘관 이·취임식을 엄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부대 지휘권의 이양을 명확히 함으로써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새 지휘관에 대한 부대원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임하는 지휘관이 전역하는 경우에는 전역식까지 겸하게 된다. 이임 지휘관으로서는 전역사를 통해 자신의 군 생활을 총정리하면서 명예롭게 은퇴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장군들이 전역식의 영예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고인이 된 정용후 전 공군참모총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정 전 총장은 1990년 9월 차세대전투기 기종을 F-16으로 바꾸라는 상부의 압력을 무시한 채 조종사들의 의견을 존중해 F-18 기종을 고수한 ‘죄’로 서울수도병원에 25일 동안 감금되었다 강제 전역조치를 당했다. 

‘공관병 갑질’로 육군 2군사령관에서 해임됐던 박찬주 전 대장의 뒤늦은 전역사가 입길에 오르고 있다. “2년 전 군 검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후임자가 취임하는 바람에 전역식도 못한 채 떠난 게 늘 아쉬웠다”는 게 ‘셀프 전역사’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박 전 대장이 항소심에서 공관병에 대한 갑질과 수뢰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은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부하의 보직 청탁을 들어줘 400만원 벌금형을 받았고, 부인도 갑질 행위로 기소돼 있다. 후배들을 향해 군인의 도를 언급할 처지가 못된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이익보다는 정권의 이익을 위해서 인기영합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도 했다. 시민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아온 한 장군의 의식에 씁쓸하다. 국민의 군대는 정녕 요원한 것인가.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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