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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법원 부장판사 때 일입니다. 1억1000만원에 전세계약을 한 세입자가 1억원밖에 준비 못하자 집주인이 위약금을 물리며 계약을 깬 사건이 들어왔죠. 배석판사들은 금액에 따라 계약불이행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저는 달리 생각했죠. 겉으로 드러난 금액도 중요하지만 세입자가 돈을 준비 못한 사연과 집주인이 계약을 깨려는 실질적 이유를 살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헌법재판관 재직 중 소수의견을 많이 내 ‘위대한 반대자’로 불린 이영모 전 재판관의 말(2001년 동아닷컴 인터뷰)이다. 이 전 재판관은 2000년 헌재가 “과외금지는 위헌”이라고 결정할 때 유일하게 합헌 쪽에 섰다. 그는 과외를 전면 허용할 경우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 고착화와 세습의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소수의견을 냈다. “학생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과 자율적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가로막는 부작용”도 염려했다. 이 전 재판관은 농고를 중퇴한 뒤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대를 졸업했다. 2015년 타계했다.

드라마 ‘SKY캐슬’ 포스터. 사진제공 JTBC

JTBC 드라마 <SKY 캐슬>은 이 전 재판관의 우려가 현실화한 지옥도를 그려낸다. ‘공부 기계’ 강예서는 의사 지망생이다. 예서는 가난을 경험하기는커녕 구경한 적도 없다.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하거나 공감능력을 키울 만한 환경이 아니다.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누명을 뒤집어썼는데도 엄마는 “한 학기만 버티면 서울의대 간다”며 눈감으라고 한다.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예서가 의사 대신 판사가 된다면? 이 전 재판관이 다룬 전세계약 사건을 어떻게 판단할까.

<SKY 캐슬>이 비지상파 시청률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지난 19일 방송된 18회 시청률은 22.3%(닐슨코리아·전국 유료가구)까지 치솟았다. 엔딩은 이랬다. “신아고 중간고사 시험지입니다. 예서는 이번에도 전 과목 만점을 맞을 겁니다.” ‘입시 코디’ 김주영이 다시 악마의 미끼를 던졌다. 예서 엄마 한서진은 시험지가 든 봉투를 움켜쥐었다. 모녀는 욕망과 양심 가운데 무엇을 택할까. 다음 방송 때까지 온갖 ‘스포’(스포일러)가 넘쳐날 것이다. 나는 비현실적 스포에 걸고 싶다. 누군가는 진실을 말하는 쪽으로. 주제곡 ‘위 올 라이(We all lie·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와 달리.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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