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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시설관리 노조 파업에 대한 비난 중 하나는 ‘서울대 학생들, 민노총의 도서관 난방 중단에 냉골 면학. 전기까지 끊으면 ‘螢雪之功’으로 맞서라!’였다. 형설지공 뜻은 ‘반딧불의 불빛과 눈 내린 밤의 눈빛으로 쉬지 않고 공부해서 이룩한 성공’이다.

아침 여러 조간을 훑다 어느 보수신문 1면 한 귀퉁이에서 이 구절을 봤다. 흘러간 옛말인 줄 알았는데, 다시 들여다보니 ‘형설지공’에 담긴 성공과 1등 지향, 경쟁 조장의 이념은 한국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형설지공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면서 열심히 학업에 정진해 입신양명(立身揚名)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한데, 입신양명엔 그 이념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비정규직 저술노동자 박남일은 <어용사전>(서해문집)에서 입신양명을 “거만하게 서서 엎드린 이들을 굽어보고, 이름 없는 이들을 밟고 다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설 립(立)’에 방점을 두고 “허리 굽혀 설거지하지 않아도 남들이 차려준 밥상을 받아먹는 지위에 오르는 일”로 정의했다.

박남일의 뜻풀이가 과하지 않다는 건 각계에서 갑질이니 농단이니 하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회면을 주로 채우는 게 입신양명한 자들의 비리와 폭력, 불법 행위다. ‘형설지공으로 맞서라’며 결연하게 면학을 독려한 이가 갑질하는 사람이나 되라는 뜻으로 저 글을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동을 적대시하는 저 글귀에 타자에 대한 공감,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건 분명하다. 입신양명 이념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주인공이 해외 입양인일 때다. 보수언론과 기득권은 입양인의 성공 스토리에 열광한다. 입양인이 고위 관직을 맡을수록 그 정도도 올라간다. 해외 입양 자체에 깃든 구조적 폭력이나 미혼모에 대한 차별과 편견과 결부된 문제라는 점은 애써 들여다보지 않는다.

입신양명이란 옛말에 가장 큰 대척을 이루는 건 노동과 노동자다.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들은 “공부를 안 해 노동자가 된” 존재 취급을 받았다. 이들을 파업 투쟁의 주체로 보지 않고, 민주노총 하수인 취급을 했다.

보수세력에겐 ‘시키는 대로 일만 해야 할 아랫것들이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의 공부를 방해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헌법이 보장한 파업에 인질극이니 하는 말까지 가져다 붙이며 비난했다. 민주노총은 프랑스 노총 국제담당자가 “‘학생을 볼모로 한다’는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다 파업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한국 현실에 대한 자세한 추가 설명을 한참 듣고 나서야 간신히 이해하게 됐다”고 전한다.

보수세력만 노동(자)을 혐오하는 것도 아니다.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의 투쟁을 전하는 SNS 글엔 ‘이제 그만 좀 하라’는 투의 서늘한 댓글들이 달렸다. 김씨의 투쟁이 정권에 부담을 안겨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민주를 강조하는 이들 중엔 보수세력이 일부러 ‘민주’를 빼고 폄훼의 뜻으로 사용하는 ‘민노총’이란 말을 쓰는 이들도 있다. 노동은 때로는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대의 대상이 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하종강은 “공부 안 하면 노동자가 된다”는 말에 깃든 노동혐오 문제를 비판해왔다. 그는 “(화이트칼라든 비정규이든) 우리 아이들은 장차 대부분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스카이’라 불리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도 일부를 빼고는 입신양명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인서울’과 지역대학으로 그 범위를 확대할수록 입신양명의 가능성이 멀어지는 현실은 시비할 것도 없이 여러 통계로 입증됐다. 그 가능성이 낮다면, 입신양명한 자에 감정이입하게끔 하는 선전과 이념에 속거나 편승하기보단 그들의 위세와 착취에 맞서 권리를 찾는 게 우선이다.

노동자의 연대와 저항권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는 과도기다. 김용균씨의 죽음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이 부분적으로나 개정됐다. 발전노동자 정규직화도 논의에 들어갔다. 노동자들과 김미숙씨의 연대와 싸움이 이끌어낸 결과다.

합법 투쟁에도 인질 운운하는 세력에 대응하는 방법은 권리의 확보다. 한국은 국제노동기구(ILO)의 8개 핵심 협약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협약’ 등 4개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143개국이 8개 모두를 수용했다. 한국에선 ILO가 불온한 국제 노조단체처럼 비치지만, 이 기구에는 사용자와 정부도 들어간다. 진짜 좌파들은 ILO 기준을 ‘착취의 하한선’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교육청이 노동권 개념을 다룬 ‘노동인권 지도자료’를 서울지역 고교에 배포하기로 했다. 진보교육감이 들어서고 5년 만의 일이다. 교과서에 실어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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