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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남겨진 신발

opinionX 2016. 11. 3. 10:38

인류가 신발을 신기 시작한 것은 대략 2만5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신발은 인류가 수천년에 걸쳐 이주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뜨거운 사막의 모래, 집중호우, 얼음과 눈으로 덮인 고원지대를 견뎌내기 위한 생존도구였다. 또한 신발은 몸을 장식하거나 계급을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양반집 여성들은 주로 가죽과 비단으로 만든 당혜와 운혜, 남성들은 관복을 입을 때 목화나 흑피혜를 신었다. 평민은 평상시엔 짚신, 비오는 날엔 나막신, 추운 겨울엔 설피를 신었다.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31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며 벌이진 취재진과 검찰 직원의 몸싸움에 벗겨진 신발이 놓여 있다. 강윤중 기자

한국 현대사에는 주인을 잃고 남겨진 신발에 얽힌 일화들이 적지 않다. 1979년 가발수출업체 YH무역은 경영난에 빠지자 노동자를 해고한 뒤 폐업공고를 냈다. 그러자 여성노동자 200여명은 그해 8월 9일 신민당사에 들어가 폐업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결국 경찰이 강제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21살 김경숙씨가 사망하고 여성노동자 170여명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연행됐다. 그들이 끌려간 자리에는 주인을 잃고 남겨진 신발들만 가득했다. YH사건은 유신정권의 몰락을 부른 10·26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잇달았던 대학가에도 남겨진 신발들이 많았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서면 학생들은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몸을 피했다. 경찰은 시위가 끝나면 아스팔트 위에 남겨진 신발을 수거해 시위참여 학생을 검거하는 데 활용했다. 지난해에는 1987년 6월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타이거 운동화’가 28년 만에 복원됐다. 당시 시위현장에 나뒹굴던 왼짝 운동화는 찾지 못했다. 오른짝 운동화는 이 열사의 누나가 유품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원형 그대로 복원됐다.

지난달 31일 국정을 농단한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검찰청사로 들어가면서 벗겨진 구두가 70만원짜리 명품 ‘프라다’로 알려졌다. 누리꾼들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빗대 “악마는 프라다를 신는다” “순데렐라는 프라다를 신는다” 등과 같은 비난과 조롱 섞인 글들을 인터넷에 잇달아 올렸다. 주인 잃은 신발이라도 다 같은 게 아니다. 누가, 무엇을 하다 남긴 것인가에 따라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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