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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부끄럽다.” 요즘 많이 듣는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평범한 영매 아줌마의 아바타 노릇을 하며 국가를 운영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급기야 호스트바 선수, 대를 이은 주술, 그리고 사우나 부녀회 모임까지 등장했다. 국격이 한없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에 국민은 분노를 넘어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낀다.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국정농단은 박 대통령과 최순실이 저질렀는데, 왜 부끄러움은 우리 국민의 몫일까? 울화통을 잠시 접어두고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부끄러움, 그리고 그 강도가 강화된 형태인 수치는 사람을 괴롭히고 들쑤시는 정서다. 최근 많은 사람이 공감할 이야기다. 수치를 느낀 사람은 가슴이 미어터질 듯하고, 체온이 높아져 얼굴이 붉어지고, 눈을 내리깔아서 시선을 회피하고, 몸을 움츠리게 된다. 슬픔에 빠지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신을 비하하게 된다(“아, 나는 저런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아온 개·돼지였어”). 이처럼 언뜻 보기에 수치는 혼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쳐부숴야 할 암 덩어리로 여겨진다. 실제로 어떤 임상심리학자들은 수치심이 아무 쓸모도 없는 병리적인 상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러나 수치심이 먼 과거 조상들의 번식에 영향을 끼쳤던 문제를 잘 해결하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심리적 적응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다. 첫째, 수치는 모든 인간 사회에서 빠짐없이 나타난다. 둘째, 수치심은 아주 어릴 때부터 저절로 생긴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어서 남이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도 공공장소에서 발가벗는다면 수치심 특유의 표정과 행동을 한다. 셋째, 영장류에서 열위 개체가 우위 개체 앞에서 쩔쩔매면서 복종할 때 하는 행동은 인간이 부끄러워하는 행동과 유사하다. 즉, 수치는 특정한 문제를 잘 풀게끔 정교하게 다듬어진 적응이다.

어떤 문제를 잘 풀게끔 만들어졌을까? 진화심리학자 다니엘 스니저를 따르면, 수치심은 남들이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로서 진화했다. 인간은 매우 사회적인 종이다. 내가 믿음직한 동료로서, 매력적인 배우자로서, 혹은 잘나가는 경쟁자로서 남들에게 어떻게 평가받는가에 따라 번식의 성패가 크게 좌우되었다. 따라서 수치심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가 남들에게 전달됨을 미리 막고, 부정적 정보가 이미 새어나갔으면 그에 따른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행동을 취하게끔 설계되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하는 여러 상황을 살펴보자. 사회적 지위가 내려가면 부끄럽다(예컨대,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함). 아주 쉬운 일도 잘해내지 못하면 부끄럽다(예컨대, 어른인데 자전거도 못 탐). 질병에 걸리면 부끄럽다(예컨대, 수업시간에 자꾸 기침함). 비도덕적인 짓을 저지른 게 들통나면 부끄럽다(예컨대, 성희롱 가해자로 신문에 실림).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부끄럽다(예컨대, 악수를 청했는데 깨끗이 무시당함). 고문, 강간, 아동학대 등 심각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부끄럽다(예컨대, 남편에게 맞은 상처를 이웃에게 들킴). 이 유발요인들은 지극히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어 보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남들에게 알려진다면 내 가치를 떨어뜨릴 부정적 정보가 전파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수치심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행동은 내 가치가 더 떨어짐을 막고 나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감추는 기능을 수행한다. 남의 시선을 피하고 뺨을 붉히는 행동은 자신이 이제 을이 되었음을 알려서 남들과 화해를 도모한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집에 틀어박히는 행동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가 더 새어나가는 사태를 막는다. 코르티솔 호르몬을 분비하여 우리 몸을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한다.

수치심이 개인의 가치가 남들에 의해 평가절하됨을 막는 방어라는 스니저의 이론은 당사자의 무능 혹은 일탈을 알게 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질수록 수치심이 더 심해진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또한 대학생이 교수들 앞에서 홀로 논문을 발표하는 상황처럼 당사자에게 겁을 주는 사람들로 청중이 구성되면 수치심이 더 심해진다는 사실도 잘 설명해준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수치심은 우리 국민의 몫일까? 앞서 말했듯이, 고문이나 강간, 아동학대 등 심각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도 수치심이 유발된다. 물론 합리적으로 따지면, 폭력을 휘두른 가해자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피해자가 부끄러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스니저의 이론을 적용해보면, 누군가가 심한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사실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무력 차이가 그만큼 큼이 입증되었음을 뜻한다.

결국 남들이 매기는 피해자의 가치가 하락했으니, 더 하락하는 사태를 막고자 수치심이 동원된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 덕분에 모두가 민주공화국의 시민에서 무당이 전권을 뒤흔드는 초기 국가의 신민으로 추락했다. 세계라는 청중 앞에 대한민국의 가치가 더 떨어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은 깊고 클 수밖에 없다.

전중환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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