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4대 대선을 3일 앞둔 1992년 12월15일, 부산 ‘초원복집’ 대화 녹취록이 공개됐을 때 세인들은 대선 승부가 당연히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YS)의 패배로 귀결될 줄 알았다.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부산시장과 지검장, 경찰청장 등 지역기관장들을 초원복집으로 불러모은 뒤 “부산, 경남, 경북까지만 딱 단결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하는 것이 육성으로 폭로됐던 것이다.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긴 데다 관권 선거를 획책하는 장면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유권자들이 분노할 것으로 예상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를 돕던 사람들은 밤새 흥분 속에 녹취록을 풀면서 대역전극을 떠올렸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의 YS 지지자들이 위기감에 똘똘 뭉쳤던 것이다.
척 슈머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25일(현지시간)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통화 녹취록을 들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녹취록의 위력은 막강하다. 내밀한 발언이 육성으로 폭로되는 순간 당사자는 어떤 항변도 할 수 없다. 적나라한 내용에 취지가 잘못 전달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유일한 대응은 폭로자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했다는 주장뿐이다. 실제 YS 측은 도청의 불법성을 강조했고, 일부 언론이 이를 거들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적중했다. 하지만 녹취록의 위력에 대한 신뢰는 지금도 남아 있다. 증거 취득의 불법성보다 그 내용이 훨씬 먹힐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한 녹취록이 공개됐다. 거기에는 내년 대선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민주당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 대해 우크라이나 검찰의 수사를 종용하는 장면이 들어 있다. 외국의 정상을 상대로 자신의 정적을 수사해 달라고 청탁하는 말인 것만은 명백해 탄핵 추진 사유로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초원복집 사건처럼 이 녹취록의 여파도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내내 앞서가던 바이든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져 다른 후보에 역전당했다. 전통적인 미디어의 트럼프 비판이 먹히지 않은 지 오래다. 트럼프가 스스로 녹취록을 공개한 것도 심상치 않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탈진실 시대’의 ‘확증 편향’을 실감할 뿐이다.
<이중근 논설위원>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을 열며]지키는 자를 누가 지킬 것인가 (0) | 2019.09.30 |
---|---|
[정동칼럼]우리를 믿지 마세요 (0) | 2019.09.30 |
[시론]조국사태 이후 교육개혁의 방향 (0) | 2019.09.27 |
[이기수 칼럼]조국과 ‘젊은 정치’ (0) | 2019.09.27 |
[사설]교육개혁 착수, 이번에는 ‘비교육’의 고리 끊자 (0) | 2019.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