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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은 두 이름으로 채워졌다. 전반은 아베, 후반은 조국. 8월9일 점화된 ‘조국대전’은 달포가 훌쩍 지났다. 검찰의 칼이 조국 법무부 장관을 겨누지만 아직도 끝을 다 알 수 없는 안갯속이다. 베려는 자와 그 검의 무리를 바꾸겠다는 자의 눈빛엔 한 치의 밀림이 없다. 조 장관 부인을 소환하면 곧 검찰의 수사기록과 패는 까진다. 낙마일까, 역풍일까. 대통령이 내민 잣대는 장관 본인의 ‘의혹만이 아닌 명백한 무엇’이다. 부인 구속일지, 조 장관의 피의자 조사나 기소나 판결 시점일지 맺고 끊는 출구는 모호한 채 조국사태는 낯선 길을 가고 있다. 새벽 공기가 서늘하지만, 한낮 열기는 다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도 갈라졌다. 내가 겪는 술자리만 그럴까.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다.
조국사태의 중심을 본다. ‘칼의 노래’가 끝나면, 다시 머리로 맞닥뜨리고 손봐야 할 세상이다. 평창 올림픽도 예고했었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때 2030은 화난 댓글을 쏟아냈다. 올림픽의 꿈을 품고 긴 세월 땀 흘려온 한국 선수들의 희생에 불공정하다는 호루라기를 분 것이다. 평화와 공동체가 먼저라고 생각한 나는 ‘청알못(청년 알지도 못하면서)’이었다. 넘겨짚어온 그들의 울화는 깊고 동시대적이다. 층져있던 그 화는 조국 자녀의 ‘부모 찬스’를 보며 더 높이 터졌다. 계급이냐, 세대냐. 조국 파동의 정곡과 선후를 따지는 물음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따로국밥’은 없다. 자산가·정규직·비정규직·실업자가 섞인 50~60대도, 미취업자가 더 많은 20대도 뭉뚱그리기엔 안으로 너무 이질적인 세상이다. 외려 톺아지는 것은 부와 교육과 기회가 직계존비속으로만 흐르는 대물림이다. 한국 사회 부와 빈곤은 ‘쌍봉형’이고, 그 봉우리는 나날이 하늘로 솟고 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2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 참석, 머리를 만지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문제의 해법은 다른 데 있다. 미래세대와 멀어지며 유난히 빠르게 늙어가는 한국 정치다. 20대 국회의원 평균연령(59세)은 국민(42세)보다 17세나 많다. 50~60대가 83%를 독점하고, 30대는 2명, 20대는 없다. 문재인 정부 초대 내각 연령(61.5세)도 역대 가장 높았다. 극단적으로 무너진 세대 대표성은 정치를 왜곡시킨다. 부모의 맘으로 너를 본다 했지만 너가 될 수는 없었던 게 작금의 조국사태였다. 386 운동권만 침소봉대하는 보수의 세대론은 편협하고 정략적이다. 단, 그 논쟁은 자초했다. 역대 최악의 법안처리율 29.4%. 식물·동물을 지나 광물로 굳어지는 20대 국회의 중심(53.8%)에 여야 공히 50대가 있었다.
정치가 젊어져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내년 4·15 총선은 21세기에 태어난 한국인도 처음 한표를 행사하는 선거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를 꾸짖은 스웨덴의 16세 소녀 툰베리, 기업·로비스트 후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뉴욕의 29세 하원의원 코르테즈, 50명의 사망자를 낸 백인우월주의자 테러에 히잡을 쓰고 이슬람 피해자들과 슬픔을 나눈 39세 뉴질랜드 총리 저신다 아던은 이제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다. 2030도 매번 30~40%의 얼굴을 바꾸는 총선 물갈이 중심에 서고, 그것도 한두명의 구색·수혈이 아닌 수십명이 되면 기약할 수 있는 일이다. 고령의 장성 출신이 즐비한 국방위에서 2013년 30년 넘게 위생에 구멍 뚫린 사병들의 수통 문제를 제기해 바꾼 것은 30대 초선이었다. 비정규직도, 출산·육아·주거도, 성평등과 기후위기도 내 문제로 고민하고 현장을 뛰어온 2030 전문가들과 주니어 정당인들은 도처에 많다. 그들이 폭넓게 정치에 접목될 때가 됐다. 50대 정치의 축인 이인영·임종석·원희룡·김영춘이 16·17대 총선에서 국회 문턱을 처음 넘은 나이도 30대였다. 갈 길은 멀다. 청년미래특위가 유일하게 발의한 청년기본법이 20대 국회 창고에서 4년째 잠자고 있다. 20~40세대의 일자리·수당·주거·건강 문제가 지자체마다 특별조례로 들쭉날쭉 가다서다 추진되는 이유다. 청년을 땔감처럼 쓰고, 선거판에서 율동만 시키고, 기껏 한두명의 힘 없는 30대 비례대표 초선에게 청년 담론과 소통과 정책개발을 짐지우곤 미숙하다고 낙인찍는 ‘청년팔이 정치’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흔히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공자가 하늘의 뜻을 알게 됐다는 나이다. 내 귀엔 오래전 어느 유학자가 풀어준 주해가 더 쉽게 맴돈다. 보통 사람에게 그 천명은 ‘하늘의 명령’이 아니라 ‘세상 살면서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 자기 깜냥이 얼마나 되는지 객관적으로 알게 되는 나이가 쉰’이라고 했다. 누가 권력과 물질과 패거리만 좇는지, 누가 세상을 두루 보듬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인지 옥석을 가리면 된다. 사람을 구하고 세우는 공천과 선거가 그것이다. 2006년 이맘때였다. ‘진보개혁의 위기’를 탐사하며 익명을 요구한 386 정치인의 가슴속 참회를 들었다. ‘타는 목마름으로’를 떼창하던 1987년 6월 선술집에서 그가 했던 말이라고 19년 만에 후배가 아프게 돌려준 말이었다. “일어서서 목마름을 말하지 않는 자에게 더 이상 샘물을 주려는 사람이 있을까.” 그 말은 13년이 지난 지금도 울림 있고 유효하다. 절박한 정치만 남아야 한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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