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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후 대전시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NC 다이노스 - 한화 이글스 경기. 13연패의 수렁에 빠진 한화 한용덕 감독이 더그 아웃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성배(聖杯)는 신성하고 고귀한 술잔이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포도주를 나눈 잔을 지칭하기도 한다. 기적의 힘을 지닌 성물로 여겨진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나서는 전설도 전해내려온다. 근래에는 ‘독이 든 성배(Poisoned Chalice)’라는 말이 숙어로 쓰이며 귀에 익숙해지고 있다.
‘독이 든 성배’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에 쓴 뒤 널리 퍼졌다. <맥베스> 1막 7장의 서두, 부인이 자신에게 던컨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기를 부추기는 상황에서 나온 주인공 맥베스의 독백이다. “정의의 신은 ‘독이 든 성배’를 따른 자의 입술에 그 독을 퍼부을 것이니….” 독이 들어있는 줄 알면서도, 비극적인 결말이 예견되는데도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독배를 들이켜고야 마는 인간의 욕망과 고뇌를 드러낸 장면이다.
여기서 비롯된 ‘독이 든 성배’라는 말은, 명예와 보상이 따르는 매력적인 기회지만 실패와 손해 내지는 파멸로 귀결될 우려가 높은 일로 정의된다. 영광과 동시에 큰 부담이 안겨지는 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스포츠에서도 이 말은 빈번하게 쓰인다. 국내에서는 거스 히딩크 이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가 어김없이 이 말로 불렸다. 월드컵 4강급 성과에 못 미치고 실망을 주며 경질되거나 사퇴한 움베르투 코엘류·조 본프레레·울리 슈틸리케·홍명보 감독 등이 줄줄이 독배를 들이켰다. 해외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 후임으로 6년 계약을 맺었다가 단 10개월 만에 성적부진으로 쫓겨난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이 대표적인 사례다.
요즘엔 이 말이 여러 분야로 퍼져나가고 있다. 스포츠 팀 감독뿐 아니라 정·관계에도 두루 쓰인다.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단명 사례가 잦았던 기관장 자리들이 단골로 호명된다. 프로야구 한화가 엊그제 14연패한 뒤 한용덕 감독이 사퇴하자 ‘독이 든 성배’ 얘기가 또 나왔다. 역시 명예와 실패가 동전의 양면임을 말해준다. 그래도 누군가는 또 ‘독이 든 성배’를 손에 들 것이다. 눈앞의 이익과 명예에 휘둘리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며 앞선 독배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제 입술에 독을 안 묻힐 수 있다.
<차준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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