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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1일 중국 난징에 일본군 ‘위안부’ 전시관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이 개관했다. 중국에 아시아 최초이자 최대의 ‘위안부’ 기념관이 들어설 수 있었던 데에는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의 결정적 증언이 있었다. 그녀는 2003년 11월 난징을 방문해 리지샹 2호 건물이 자신이 갇혀 있던 일본군 위안소 ‘긴스이루’라고 밝혔다.

평남 남포 출신의 박영심은 1938년 난징의 ‘긴스이루’로 끌려갔다. 하루 30명의 일본군을 상대했다. 끔찍하고 무서워 도망칠 생각도 못했다. 3년 뒤에는 미얀마의 라시오에 위안소로, 다시 2년이 지나서는 중국 윈난성 쑹산 위안소로 옮겼다. 1944년 쑹산의 일본군은 연합군의 반격으로 궤멸했다. ‘위안부’들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연합군은 쑹산의 승전보를 전하면서 위안부들의 처참한 상태를 함께 보도했다. 영자신문 ‘라운드업’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아무 금전적 대가 없이 병사의 옷을 빨고, 요리를 하고, 거주하던 동굴을 청소했다”(1944년 11월30일자)고 썼다. 쑹산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위안부’는 4명에 불과했다. 미군은 특별한 전쟁 피해자인 ‘위안부’를 사진에 담았다. 그 가운데 만삭의 박영심도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이던 1944년 9월 미군이 중국 쑹산위안소에서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사진 속 가장 오른쪽 만삭의 몸으로 괴로워하는 앳된 여성이 훗날 국제사회에 일제 만행을 증언한 박영심 할머니(1921~2006)다(위 사진). 가운데와 아래 사진은 1944년 8월14일 미얀마 미치나에서 촬영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이다. 서울시·서울대 정진성 연구팀 제공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간 박영심은 1990년대 북한이 ‘위안부’ 조사에 나서자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앞장섰다. 증언집을 발간하고 도쿄의 법정, 난징·쑹산의 옛 위안소를 찾아 진실을 알렸다. 자신이 사진 속의 만삭 여인이라고 확인했다. 남에 김학순이 있었다면 북에는 박영심이 있었다. 박영심은 2006년 8월 평양에서 작고했다. 중국 정부는 난징 ‘위안부’ 전시관 개관에 맞춰 박영심의 임신한 모습을 담은 동상을 앞마당에 세웠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원본 사진들이 처음으로 공개된다(25일부터 서울도시건축센터). 서울대 정진성 교수팀이 확보한 사진 속에는 쑹산 위안소에서 만삭의 몸으로 괴로워하는 박영심도 들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10만~20만명으로 추산된다. 정부에 신고한 피해자는 240명. 이 중 생존자는 23명에 불과하다. 평균연령 91세로 언제 작고할지 모른다. 시간이 없다. ‘위안부’ 연구·조사는 물론 증언도 채록할 필요가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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