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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말문이 막혀

opinionX 2016. 10. 31. 10:43

‘우두망찰’이라는 말은 정신이 얼떨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부사어다. 황망한 나머지 얼굴이 바래지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때 곧잘 쓰인다. 시쳇말로 ‘말문이 막히는’ 지경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뒤 수상 여부에 대해 침묵하던 밥 딜런이 엊그제 한림원 사무총장과의 전화통화에서 “상을 받을 거냐고요? 당연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그간의 묵묵부답에 대해 “그 뉴스가 나를 ‘말문이 막히게(speechless)’ 만들었다”고 했다. 흔히 말문이 막히는 것은 놀라는 경우다. 딜런의 말문 막힘은 놀랍고 믿기 어려운 소식에 대한 영광의 여운일 테다. 반면 한국 시민들은 딜런과 정반대로 믿기 힘들 정도로 화나는 소식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최순실씨가 2014년 11월3일 서울 강남 신사동의 한 의상실에서 녹색 재킷을 들어보이고 있다(왼쪽 사진). 일주일 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TV와의 인터뷰 때 이 옷을 입고 있다. TV조선 화면 캡처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최순실씨와의 관계를 ‘의견을 묻고 도움을 받는’ 정도로 설명했지만 연설문 수정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인사 개입, 문화·체육 분야는 물론 외교·안보 정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또 깊숙하게 이뤄진 국정농단 의혹에 숨쉬는 것조차 힘겨울 지경이다. 박 대통령을 두고 최씨의 ‘꼭두각시’ ‘아바타’라는 표현이 예사로이 쓰이는 현실이다. 사태 이후 모르쇠로 발뺌하는 청와대 비서관들의 모습, 그 와중에도 “대통령이 가장 힘들 것”이라며 머리를 조아리는 얼빠진 모습도 말문을 잃게 한다. 박 대통령과 최씨의 관계를 두고 사교(邪敎) 얘기가 나돌고, 최씨의 남자는 호스트바 출신이라는 보도까지 떠올리면 우리가 숨쉬는 한국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은 도널드 트럼프의 성추문 폭로 등 막장 드라마로 치닫던 미 대선을 “그들(트럼프 진영)이 저급하게 갈 때 우리(힐러리 클린턴 진영)는 품격 있게 간다”는 말로 정리했다. 이후 이 표현은 미 대선의 상징어가 됐다. 최순실 사태를 어디까지 봐야 하고, 실망해야 할까. ‘최순실 게이트’는 이제 단지 개인의 비리가 아니라 한국의 비극이 될 수 있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 우두망찰 상황에서 품격을 지키며 담대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최씨의 막장 드라마를 끝내고, 시민의 분노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사태의 직간접 당사자인 대통령에게 오롯이 달려 있다.

박용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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