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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만들지만, 헌법은 국민이 만든다. 헌법 제130조가 헌법개정을 국민투표로 확정하게 하는 이유다. 주권자인 국민이 만드는 헌법은 그래서 최고법이 되는 것이다. 이런 헌법은 모든 헌법기관에 권한도 주지만 의무도 부과한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에게 헌법 준수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헌법 제69조가 그것이다. 이 헌법 69조에 따라 대통령 취임선서도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라는 말로 시작한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헌법적 책임을 부담하는 것이다.

요즘 국민들은 아침에 신문을 보고, 인터넷을 켜기가 겁이 난다. 하루가 다르게 비선 실세들의 국정농단에 관한 의혹 제기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 의혹의 내용이라는 것도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까지 언론에서 제기된 의혹들만 놓고 보더라도 사실이라면 큰 문제다. 언론에서는 대통령기록물의 무단 유출에 관한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제14조나, 공무원의 직무상 비밀 누설에 관한 형법 제127조 등 법률 단계의 저촉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적 책임보다 헌법적 책임이 훨씬 더 중요하다. 헌법에서 탄핵사유로 대통령 등 고위직 공무원이 ‘직무집행에 있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라고 규정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법률 위반보다 헌법 위반이 훨씬 더 엄중한 것이다.

만약 제기된 의혹들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첫째, 헌법상 ‘민주공화국’이라는 우리의 국가형태 조항을 부정하는 것이다. 헌법 본문은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으로 시작한다. 헌법학자들은 ‘민주공화국’에서 ‘공화국’은 군주 한 사람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다수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공선에 대한 헌신 속에서 국가의사가 결정되는 ‘공화국’임을, ‘민주’는 그 공화국의 정치적 내용이 공개된 과정을 통해 민주적으로 형성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국민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조직형태나 기본적 가치질서에 대해 이룬 가장 중요한 합의이다. 헌법개정절차에 의해서도 바꿀 수 없는 헌법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민주공화국’은 권력의 기초로서 국민주권원리, 이념으로서 민주주의, 통치방식으로서 권력분립원리 등에 입각해야 한다. 이에 비해 ‘민주공화국’과 대립되는 개념인 ‘전제공화국’은 ‘전제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하는 국가를 말하며, 이때 ‘전제주의’란 개인이나 집단 등 단일세력이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다른 국가기관에 의해 적절한 통제를 받지 않는 체제를 말한다. 자격도 없는 비선 실세가 공공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 이익을 위해 밀실에서 국정을 농단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도대체 민주공화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둘째, 헌법상의 국민주권원리에 반한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원래 국가의사를 결정하는 최고의 독립된 힘인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데,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선거로 뽑은 대통령에게 ‘주권’에서 나오는 권한을 위임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권한의 위임은 국민들이 선거로 뽑은 대통령에게만 이루어진다. 그 이외에 누구도 대통령의 권한을 사실상 대신 행사하거나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개입할 수 없다. 대통령도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신성한 권한의 행사에 헌법적 근거 없이 다른 이들의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미리 보고 고치고 대통령의 각종 국정행위에 무소불위로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국민주권원리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지금부터라도 대통령은 헌법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의 목소리에 여과 없이 직접 귀 기울이고 그에 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의혹과 관련해서는 진실규명에 협조해야 한다. 검찰의 청와대 비서관 사무실 압수수색을 거부하는 식의 안이한 대처는 국민적 분노만 키울 뿐이다. 야당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 일각에서도 내각을 독립적으로 이끌 중립적인 책임총리 임명을 주장하고 있다. 마침 우리 헌법 제87조는 국무위원을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임명할 수 있게 해 책임총리제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지 않은가. 여야가 두루 받아들일 수 있는 인사를 책임총리로 임명하고 여야를 아우르는 인사들로 거국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대통령의 신속한 대승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 나라를 위해 비정상적인 국정 마비 상황이 오래가선 절대 안 된다. 이것이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적 책임에 응답하는 길이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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