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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제(柯潔) 1위, 알파고 2위, 박정환 3위…이세돌 5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직후 바둑전문랭킹사이트인 ‘고레이팅’이 발표한 세계랭킹이다. 화제의 주인공인 이세돌의 랭킹이 실은 커제(중국 1위)와 박정환(한국 1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커제 9단은 최근 세계 3대 타이틀(바이링배·삼성화재배·멍바이허배)을 휩쓴 기사다. 국내 기사들은 커제와의 전적에서 19승41패의 참담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이세돌 9단도 절대 열세(2승8패)다. 커제는 도발적인 언행으로 자주 인구에 회자되었다. 지난 1월 멍바이허배 결승을 앞둔 이 9단이 “내가 이길 확률이 50%”라고 예측하자 커제는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50%씩이나…. 5%겠지.” 19살 청년의 ‘시건방’을 승리로 다스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번번이 패해 물러나니 장이 뒤집힐 판이다.

박정환 9단(23)이 버티고 있었지만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사실 박 9단은 2011년 불과 18살에 후지쓰배 우승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기사다. 2013년 농심배에서는 막판 2연승으로 극적인 우승을 견인했다. 지금까지 29주 연속 국내랭킹 1위를 질주하고 있다. 그러나 뭔가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그랬던 박정환 9단이 상하이에서 열린 ‘바둑올림픽’(응씨배)에서 커제를 꺾고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두 기사는 얼마 전 수지(박정환)와 Lurk(커제)라는 아이디로 펼친 인터넷 10번기에서 5승5패의 호각을 이룬 바 있다. 두 기사의 스타일은 꽤 다르다. 박 9단은 취미도, 특기도, 직업도 바둑일 만큼 오로지 바둑밖에 모른다. 사활 문제를 푸는 게 유일한 취미여서 ‘사활귀신’이란 별명이 붙었다.

박정환 9단과 커제 9단이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본선 8강전에서 승부를 겨루고 있다_경향DB

커제 9단은 거침없는 말투 때문에 ‘밉상캐릭터’로 알려졌다. 그러나 달리 보면 세인의 관심을 끄는 ‘말의 잔칫상’을 마련해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글도, 해설도, 예능감도 빼어난 팔방미인이다. 김성룡 9단은 “꼭 이창호(박정환)와 이세돌(커제)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평한다. 박정환 9단의 분발로 지긋지긋했던 ‘커제 공포증’을 털어냈으니 반가운 일이다. 인간 대 기계에서 이젠 인간 대 인간…. 앞으로 두 라이벌 이 빚어낼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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