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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열사의 부활

opinionX 2014. 11. 10. 21:00

1975년 4월11일 서울대 농대 4학년생 김상진은 ‘양심선언’과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남기고 할복자결했다. 연단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던 그는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러운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는 마지막 부분은 읽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은 학생들의 저항 의지에 불을 붙였고 유신체제 붕괴로 이어졌다.

민주화 도정의 대한민국은 ‘열사’의 나라였다. 김상진이 양심선언에서 “민주주의 나무는 피를 먹고산다”고 했듯이 한국 민주주의도 많은 희생을 자양분으로 성장했다. 그것도 꽃다운 나이의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지난 8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이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제1회 서울대 민주열사·희생자 합동추모제’다. 추모 대상이 된 열사와 희생자가 서울대만도 34명에 이른다고 하니 새삼 놀랍다.

열사와 희생자의 면면을 보면 더 새삼스럽다.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던 암울한 시대와 처절한 역사의 현장으로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김상진·김세진·이재호 등 할복·분신·투신한 7명 열사에 대한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고순자·김치호 등 4월혁명 때 경찰의 총에 희생된 6명의 열사도 마찬가지다. 시위 도중 추락사한 황정하,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기억도 생생하다. 이진래·우종원·김용권·한희철 등 의문사도 10명이나 된다. 대부분 녹화사업과 관련이 있다. 행방불명, 노동운동 중 사고사나 병사, 정보기관에서 조사받다 투신 사망한 경우도 각각 2명씩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3명 가운데 2명은 최근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전태일 열사 44주기 추모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이 9일 서울 청계천1가에 모여 대학로까지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서울대가 뒤늦게 ‘열사’를 부활시킨 배경은 무엇일까. 합동추모제를 주도한 서울대 민주동문회에 따르면 최근 정국과 관련이 있다. 서울대는 다른 대학과 달리 별도의 민주동문회 없이 문과대에 ‘자하연’, 이과대에 ‘이공회’, 그리고 농대와 수의대에 ‘김기사’(김상진기념사업회) 등이 그 역할을 대신해왔다. 이명박 정부 이후, 특히 박근혜 정부 들어 이른바 이들은 “민주주의의 역주행이 도를 넘고 있다”며 지난 2월 3단체를 통합해 서울대 민주동문회를 발족했다. 현 정부가 열사들의 잠을 깨운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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