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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장수 재앙

opinionX 2015. 3. 31. 21:00

한때 중·장년층 이상의 술자리에서 애용되던 건배 구호가 ‘구구팔팔이삼사’였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2~3일간 앓다가 4일 만에 죽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일 터이다. 오래 건강하게 명대로 살다가 자녀가 임종하는 가운데 생을 마감하는 것은 동양인의 오랜 로망이기도 했다. 서경(書經) 홍범편에는 인생의 다섯 가지 복으로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덕을 쌓는 것)·고종명(考終命·제 명을 다하고 죽음)을 들었다. 청나라 학자 적호(翟灝)는 ‘통속편(通俗編)’에서 좀 더 서민적인 오복으로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 귀(貴)와 자손중다(子孫衆多·자손을 많이 남김)를 넣었다. 구구팔팔이삼사라는 일곱 자 안에 이 모든 인생의 복록이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요즘 이 건배 구호를 잘 들을 수 없다. 한때의 유행처럼 반짝했다가 시들해진 면도 있겠지만 시대적·사회적 분위기가 작용한 점도 있는 것 같다. 오복 중에 으뜸이던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부담인 시대요,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저출산·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청년실업이라든가 연금개혁 문제 등이 심각한 사회 현안으로 떠오르면서다. 그래서 건배 구호가 2~3일 앓아 자식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서 ‘구구팔팔복상사’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그마저 눈치가 보여 잘 사용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장수상회’ 스틸사진 (출처 : 경향DB)


1970년대 <장수 만세>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누렸다. 그때만 해도 경로·효친은 전 연령층이 공감하는 절대적 가치였다. 장수하는 집안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개인적 노후 준비나 국가·사회적 복지제도가 미비한 마당에 장수는 곧 재앙이라는 쪽으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심지어 초·중·고등학교 교과서까지 ‘장수 재앙’을 말하고 있다니 놀랍다. 박윤경 청주교대 교수 등이 57권의 도덕·사회·경제 교과서를 분석하니 대부분 고령화를 노인 부양 부담 증가, 경제 성장 둔화, 국가 경쟁력 약화 등 부정적 관점으로 기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장수 만세’가 ‘장수 재앙’이 되는 현실은 매우 곤혹스럽고 혼란스럽다. 구구팔팔이삼사는 고사하고 ‘웬만하면 90살,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산다’는 농담이 뼈 있게 들리는 세상이다.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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