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자어는 여러 국면에서 시비를 부른다. 한자를 안 배워 심지어 한자에 대해 공포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왜 ‘외국어’인 한자(어)를 써야 하느냐?”는 펀치를 날리기도 한다.
안 쓴다고 누가 탓하랴! 다만 윗글의 ‘국면’ ‘시비’ ‘공포’ ‘적대감’ ‘외국어’가 다 한자어인 점을 염두에 두고 찬찬히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한자가 뜻을 붙들고 있지 않다면 그 낱말은 다만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글자 한글의 특성이다.
한자어가 우리말인 것은 ‘펀치’라는 영어가 우리말처럼 쓰이는 것보다 더 언어적 친연성(親緣性)이 크다.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오픈’이나 ‘파이팅!’이 ‘문 열다’거나 ‘힘내라!’라는 뜻보다 더 가까운 ‘우리말’이 된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한자건 영어건 자연스레 품어 마땅한 뜻을 뿜어내는 너른 품이 한글의 큰 공덕이다.
‘흰머리가 3000장이나 됐다’는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뻥’이다. 장(丈)은 10자(1자는 약 30㎝) 길이다. 수심(愁心), 즉 시름하는 마음 때문에 그리 됐다는 것인데, 한편 국어교육의 과장법 예문으로도 자주 쓰인다.
‘이억만리’라고 쓰는 사람도 있더라, 급기야 언론인도 예외는 아니다 등의 한탄 섞인, 추궁하는 듯한 글이 신문에 요즘 실린다. ‘이역만리’가 정답이다, 잘 알겠는가? 이런 말씀들이다. 딱하다. 그 이억만리는 억만리(里)의 두 배인 二億萬里일 것이다. 10리는 4㎞쯤이다. 백발삼천장과 이억만리가 어찌 다른가? 과장법 원리에 한 치라도 어긋나는가? 한자 없이 큰 세대가 이역만리(異域萬里)가 ‘만리나 떨어진 다른 지역, 즉 외국’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르쳐준 적 있는가? 참 나쁜 ‘기성세대’들이다. 그러고는 ‘무식하다’고 무책임한 지적질이라니.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가 텅 비도록, 젊은이들은 모두 중동에 가라’고 하자 갑자기 ‘이억만리 중동’이란 말이 인터넷에 만발했다. 신문 등이 입을 모아 ‘그게 아니고, 이역만리!’라 외쳐도 소용없었다. 신조어로 봐야 할까?
그림을 통한 한자공부 교재 (출처 : 경향DB)
한자(어)를 가르치지 않았으면, 그 말을 해석하는 도구라도 마련해줬어야 한다. 아니면 쓰지를 말든지. 우리의 국어는 한국어인가 한글인가 하는 바보 같은 질문이 언어학의 거창한 명제처럼 들리는 어처구니없는 언어세상을 우리는 산다. 한자어도 외국어와 함께 너끈히 소화하는 큰 역량의 한글이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 아니던가?
후배 세대가 한자어 없이 얼마나 어지러운 말글의 정글을 헤매고 있는지, 한자 아는 세대들은 모를까?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참 비겁하다. 언어는 ‘정치’가 아니다. 삶과 배움의 도구다. 한국어는 빠진 데 없이 튼실해야 한다. 왜 한자 배워주는 것만 ‘아이들 학습부담 키우는 것’이어서 시비의 대상이 되는지 하는 점도 한심하다. 반항이 필요한 시점일까?
학교가 안 하면 집에서라도 하자. 늦었다 생각하는 젊은 엘리트들은 이제라도 ‘올바른 한국어’로 무장해 스스로 차별화하라. 말과 글이 트여야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읽고 쓰기 위한 전제조건일 터, 진짜 스펙이다.
강상헌 |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세월호 1주기에 ‘관제 대회’ 열겠다는 정부 (0) | 2015.03.31 |
---|---|
[사설]인권위의 ‘역주행’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0) | 2015.03.31 |
[사설]정부는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안 다시 만들라 (0) | 2015.03.30 |
[기고]사행산업감독위는 빅브러더가 되려 하나 (0) | 2015.03.29 |
[시론]‘성소수자보호금지법’이라는 유령 (0) | 2015.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