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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의 시작을 알리는 2000년은 한국 재벌사에도 인상적인 해다. 100년 역사의 재계 판도가 뒤집힌 날이기도 하다. 서열 1위인 현대그룹이 이른바 ‘왕자의 난’을 거치며 삼성에 1위 자리를 내줬다. 현대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인 경영권 분쟁은 재벌의 숨겨진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자회견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서울 계동 사옥 본관 문을 걸어 잠근 채 상대방 진영의 출입을 차단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한 편의 코미디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친필 서명을 둘러싼 위·변조 논란도 여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수십조원의 판돈이 걸린 경영권 분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권력의 세계와 다를 게 없다. 승자독식 구조라는 속성을 감안하면 당대에 끝나는 싸움도 아니다. 어디 현대그룹뿐이랴. 형제간에 우애가 좋기로 유명했던 두산그룹도 경영권 분쟁을 거치며 재벌 총수가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는 비극을 연출했다. 40대 재벌그룹 중 17곳이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는 통계도 있다. 거의 2곳 중 한 곳꼴이다. 현대 이후 14년이 지난 지금도 총성 없는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국내 재벌 총수들이 오찬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다음달 CJ 이재현 회장의 선고 공판을 앞두고 범삼성가에서 이 회장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는 소식이 재계의 화제다. 삼성과 CJ는 앙숙이라 불릴 정도로 수십년간 분쟁에 시달려왔다. 근자에도 삼성의 이 회장 미행 사건과 사상 최대 규모의 소송전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번 탄원서를 계기로 양가가 해묵은 앙금을 털고 화해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반가운 일이다. 한국의 대표기업이 당대의 경영권 분쟁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며 소모전을 벌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기업 분쟁은 한낱 집안싸움으로 치부하기엔 후유증이 너무 크다. 우리 경제는 지금 경기 침체와 청년실업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기업의 몫이다. 국가경제를 위해 헌신해야 할 기업 총수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형제의 난’ ‘왕자의 난’ 같은 단어는 없어져야 할 유물이다. 가뜩이나 기업 총수들의 잇단 구속과 법정 다툼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한국 경제를 위해서도 재계가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박문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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