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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조인식 펜

opinionX 2018. 9. 28. 10:49

역사상 만년필이 가장 주목받은 장면은 1945년 9월2일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다. 이날 도쿄만에 떠 있는 미 해군 미주리 함상의 녹색 테이블 위에서는 만년필의 향연이 펼쳐졌다. 먼저 일본 측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우메즈 요시지로 사령관이 서명에 나섰다. 두 사람은 데스크 펜을 외면하고 만년필로 서명했다. 이어 연합군 대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한 움큼 꺼내더니 두 권의 항복문서에 사인해나갔다. 처음 사용한 두 자루는 뒤에 서 있던 미군과 영국군 장군에게 건넸다. 이어 두 개의 펜으로 추가 서명한 뒤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파커사의 듀오폴드 오렌지 만년필을 집어들었다. 작가인 아내 진 맥아더가 20년 동안 사용한 펜을 빌려와 서명식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선글라스와 파이프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 줄 알았던 맥아더다운 연출이었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왼쪽 책상에 앉은 이가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이고, 오른쪽 책상에 앉은 이가 북한.중국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만년필이 조인식에 쓰인 것은 편의성 덕분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인 서명에 쓰이다보니 펜에 상징성이 부여됐다. 시게미쓰 외상은 항복문서에 미제 만년필로 서명했는데 직후에 불태웠다고 한다. 항복에 대한 일본인들의 정서가 투영된 미확인 전언이다. 파커사가 태평양전쟁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맥아더의 듀오필드 만년필을 복제한 것도 이런 상징성에 기댄 흥행술이다. 1997년 임창렬 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때 몽블랑으로 서명했다가 구설에 오른 것도 마찬가지다. 2016년 콜롬비아 내전 종식 서명식에 총알과 탄피를 녹여 만든 펜이 쓰인 것처럼 지금도 특별한 의미를 담은 펜들이 제작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조인식에 사용한 펜을 두고 말이 많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몽블랑으로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했는데 문 대통령은 문구점에서 파는 네임펜을 썼다는 것이다. 엊그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자유무역협정에 흔하디흔한 유성펜으로 서명한 뒤 이를 문 대통령에게 건넨 것을 두고는 외교결례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디지털시대에 펜 종류를 가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 서명에 특별한 의미를 담은 펜을 써 길이 남길 필요는 있다. 남북통일 협정문을 평범한 펜으로 서명한다면 허전할 것 같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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