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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치료적 사법

opinionX 2020. 2. 11. 10:34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법과 원칙, 증거 등에 따른 사법부의 단죄는 당연한 ‘절차적 정의’다. 살인은 특히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다. 그런데 아내를 살해한 이모씨(68)에게 서울고법이 10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면서 “집행유예 기간 동안 보호관찰 아래 치매전문병원에서 계속 치료받을 것”을 명령했다. 이날 선고는 치매를 앓고 있는 이씨가 치료 중인 경기도의 한 병원에서 이뤄졌다. 법정 밖 선고도 이례적이지만, 살인 범죄자에게 집행유예와 함께 전문치료를 선고한 것은 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국내 첫 ‘치매 환자에 대한 치료적 사법절차에 따른 판결’이다.

10일 경기 고양시 일산연세서울병원에서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치매 노인 이모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치료적 사법은 처벌보다는 문제해결에 주목적이 있다. 전통적인 사법체계의 틀 안에서 보완적으로 도입된 새로운 사법 결정 방식이다. 이를 위해 판사는 물론 검사, 변호사, 피해자의 동의와 협조는 필수적이다.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 대신, 유죄 인정 피고인의 치료와 재사회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씨는 중증 치매 환자다. 아내 살해 후 구치소에 수감 중 면회 온 딸에게 “왜 엄마는 같이 오지 않았느냐”고 말할 정도로 증상이 심하다. ‘아내 살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녀들은 선처를 원했다. 검사는 현 치료감호 절차를 통한 치료는 시설의 한계로 어렵다고 했다. 이씨가 별도의 치료 없이 징역형을 살게 될 경우 그의 공격적 치매 성향은 더욱 강화될 게 뻔했다. 교정의 목표인 ‘재사회화’는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재판부가 선택한 것이 치료적 사법이다. 재판부는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선언한 헌법과 조화를 이루는 결정”이라고 했다.

치료적 사법은 1987년 데이비드 웩슬러 미 애리조나대 교수에 의해 처음 등장, 제도화됐다. 이후 캐나다·호주·독일·뉴질랜드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플로리다주 약물법원 등 문제해결 전문법원만 1000여개다. 우리의 치료적 사법은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대법원이 올해 처음 기본연구과제로 채택, 연구 중이다. 범죄자에게 법에 따른 일정한 고통만을 부과, 때로 ‘효용 없는 처벌’에 그쳤던 우리 사법 시스템이 점차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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