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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국가에서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고전적 정의도 있고, 다원주의 국가관에서는 ‘갈등의 발견과 문제의 해결’로 보기도 하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그 어디에도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처럼, 정치는 말로 하는 패싸움이라는 정의는 없다. 비통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정치인들의 책임일 수도, 아니면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제스처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보통사람들의 책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를 보건대, 그것을 매개하는 평론가들과 언론의 책임이 작지 않다.

소위 어용지식인을 자처하는 논객들은 사실 언론이 그 말을 진지하게 전할 필요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치란 패를 나눠 싸워 이기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상대의 잘못은 다소 불확실하더라도 크고 선명하게, 우리 편의 잘못에는 눈을 감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말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여기에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이나 비유로 상대를 매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나를 다 믿지는 마세요’ 하고 이 패싸움에 뛰어든 사람들인데, 그것이 사실을 구별하고 진실을 가리는 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아무리 급해도 술자리 담화를 지면으로 끌고 오면 안된다. 공개적으로 육두문자를 섞어서 하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상대는 없다. 풍자에는 해학이 있어야 하고, 비판에는 애정, 걱정, 비전 중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민주당만 빼고’ 식의 무책임한 말을 해서도 안된다. 민주당만 아니면 우리공화당이나 자유한국당, 정의당을 찍는 것이 다 똑같다는 말인가? 이것은 이론적으로 보면 좌익소아병이나 좌익모험주의인데, 잘 봐주어도 단순한 정치 혐오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 역시 어용지식인이나 무책임한 논객들과 다르지 않다. 검찰의 수사가 어떻게 모두 옳고, 문재인 정부의 정치가 어떻게 다 훌륭하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바이라인을 보면 기사를 읽을 필요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정 기자가 항상 특정 기관을 비판하거나 옹호하기만 하면 어떤 독자가 공정하다고 신뢰하겠는가? 언론이 기계적 중립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합리적 파당성이 패싸움에 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병이 났는데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묻지 않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장면만 반복적으로 보여준다면, 그것이 추구하는 것은 현실의 적나라함이 아니라 그저 선정성이다. 때로 그것이 감추어진 진실을 들추기도 한다. 그러나 뉴스가 막장드라마가 되서는 안된다.

칼 슈미트는 정치란 친구와 적이라는 이분법적 질서를 전제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한 정치라고 한 적은 없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헌법은 결코 스스로 작동하지 않으며 항상 정치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다른 방식을 통한 정치의 연장이라 했고, 모든 전쟁은 무제한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모든 정치가 전쟁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고, 모든 전쟁이 최대한의 잔인성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공적 담론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나 전쟁의 본질을 잘못 들먹이며 세상을 패싸움판으로 만들어 놓고 영웅인 양 의기양양해한다. 언론까지 여기에 편승해 있다. 비통한 일이다.

탈무드는 험담이 세 사람을 망친다고 했다.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 그 말을 듣는 사람, 그리고 험담을 하는 그 자신이다. 언론이 잘못하면 대상이 되는 정치인도, 듣는 국민도 괴롭지만, 그 자신도 망친다. 선정성으로는 언론이 유튜브를 이길 수 없다. 잘 생각해 볼 일이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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