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

[여적]1㎜ 깨알 글씨

opinionX 2017. 4. 10. 11:02

보험상품 약관은 ‘난수표’ 또는 ‘암구호’로 불린다.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투성이인 데다 표현도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보험상품 약관은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 게 대부분이다. ‘깨알 글씨 약관’을 읽으려면 돋보기를 들이대거나 동공 확대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보험사들은 특정상품의 장점은 큰 글씨로 강조하고, 가입자에게 불리한 내용은 깨알 글씨로 표기하곤 한다. 이러다 보니 가입자는 깨알 글씨 약관의 피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보험사들의 TV 광고도 마찬가지다. 광고 모델들은 보험상품의 특징과 장점은 천천히 또박또박 설명한다. 하지만 경고 문구나 가입자들에게 불리한 약관 조항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게 ‘속사포’ 고지를 한다. 은행과 증권사의 약정서에도 깨알 글씨가 적지 않다. 창구 직원들은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에 사인만 하면 된다”며 투자를 권하곤 한다. 고객들은 깨알 글씨로 쓰인 여러 쪽의 약정서를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창구 직원 말만 믿고 투자했다가 낭패를 보기 일쑤다.

7일 대법원 3부는 경품행사로 대량 수집한 고객 정보를 보험사에 팔아넘긴 혐의(개인정보보호법 위반)로 기소된 홈플러스와 전·현직 임직원에 대한 원심의 무죄 선고를 파기하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부로 돌려보냈다. 사진은 이날 오후 서울의 한 홈플러스. 연합뉴스

대법원이 7일 유통업체 홈플러스의 ‘1㎜ 깨알 글씨 고지(告知)’는 불법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홈플러스는 2011~2014년 경품행사를 통해 모은 고객 개인정보 2400만여건을 보험사에 팔아 231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2015년 2월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검찰은 홈플러스가 경품행사 응모권에 ‘개인정보가 보험사 영업에 활용될 수 있다’는 고지사항을 1㎜ 크기의 글씨로 알아볼 수 없게 기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2심 재판부는 1㎜ 깨알 글씨이지만 응모권 뒷면에 고지사항을 기재했다며 홈플러스에 무죄를 선고했다. 1·2심 판결 뒤 “판사들의 시력은 10.0인가”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한 소비자단체는 1㎜ 크기의 글씨로 작성한 항의서한을 재판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1㎜ 깨알 글씨 고지는 부정한 방법으로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동의를 받은 것”이라며 원심을 파기하고 유죄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소비자를 눈뜨고도 당하게 만드는 깨알 글씨 마케팅은 사라질 때가 됐다. “약관이나 설명서의 글씨 크기는 양심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기업과 금융사가 새겨들어야 할 소비자들의 ‘경고’다.

박구재 논설위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