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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은 자기네끼리 모여앉아 국가 현안을 토의하고 결정한다. 나는 평범한 시민이라, 한 번도 그런 모임에 낀 적이 없었다. 권력자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이야기가 쌓여 있다.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중종 때의 깨알 같은 기록이다. 개혁정치가 조광조 등이 참석한 경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어전에서 경전의 심오한 뜻을 캤고, 이것을 당대의 현실 문제와 결부시켰다. 잘은 몰라도, 지금의 권력자들도 중요한 회의 석상에서는 국내외 석학들의 이론을 인용하며 적절한 해결 방안을 강구하려 하지 않을까.

조광조가 정력적으로 개혁을 추구하던 중종 13년(1518) 9월15일의 일이었다. 그날 경연 석상에서는 <대학(大學)>이란 경전이 화제였다. 길고 긴 그들의 토론을 나는 편의상 3회전으로 쪼개보았다. 1회전과 2회전은 순수한 학문적 논의였는데, 처음에는 주로 ‘인(仁)’을 논의하였고, 나중에는 ‘경(敬)’의 의미를 따졌다. 3회전에 이르러 토론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미쳤다. 혈통이 끊기고 만 “노산군(단종)”의 계보를 이어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경연에 참가한 사람은 중종을 비롯해 총 13명이었다.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해, 좌의정 신용개와 우의정 안당이 참석했다. 의정부 좌참찬 조원기와 예조판서 이계맹, 호조판서 고형산, 형조판서 이유청도 있었다. 조정 원로대신들이 골고루 참석한 것이었다.

개혁파의 수뇌부도 다 나왔다.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를 정점으로, 대사헌 김정, 도승지 문근, 승지 권벌과 김정국이 참석했던 것이다.

경연에서 누가 발언을 많이 했는가를 살펴보면, 그날의 경연을 주도한 세력이 절로 드러난다. 학문적 토론을 좌우한 이는 다름 아니라 조광조와 그의 동료 김정이었다. 시사 문제를 적극 거론한 이도 그들의 동료인 권벌과 김정국이었다. 대신들 중에는 소극적으로나마 토론에 참가한 경우도 있었으나, 침묵으로 일관한 이들이 많았다.

1회전에서는 3정승이 차례로 돌아가며, <대학>의 핵심인 ‘인’과 ‘경’의 정의를 요구했다. 조광조 등 개혁파 소장관리들이 답변에 나섰는데, 좌중의 주목을 끈 이는 김정이었다. 특히 그는 ‘경’의 가치를 강조하여, “경(敬)에는 인(仁)·경(敬)·효(孝)·자(慈)·신(信) 다섯 가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2회전은 김정이 말한 ‘경’의 개념과 기능에 대한 토론이었다. 조광조와 김정의 질의응답이 몇 차례 길게 이어졌다. 원로대신 이유청, 신용개, 조원기 등도 논의에 가세하였는데, 조광조의 무거운 한마디로 토론이 막을 내렸다. “임금은 천하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라. 임금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온 천하에 공경하지 않는 이가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 3회전이 시작되었다. 승지 권벌은 조광조의 견해에 찬동하며, 중종의 마음가짐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중종의 마음이 “공정하지 못해서”, 노산군의 제사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노산군의 후사를 정해 제사를 주관하게 해야 그것이 ‘인’의 실천이요, ‘경’의 도리라고 했다.

개혁파의 최고 이론가 김정이 권벌을 엄호하였다. 먼 옛날 중국의 고전시대에는 망한 왕조라도 제사를 잇게 하는 법도가 있었다고 했다. 그것이 임금의 “공정”한 도리라는 것이었다.

김정국도 거들었다. 그는 송나라 사마광의 학설을 빌려, 중종의 우유부단함을 비판하였다. 그는 과거 왕자의 난(1398년)에 희생된 방번과 방석의 경우에도 훗날 세종이 광평대군 이여와 춘성군 이당을 통해 후사를 이은 전례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요컨대 조광조 일파는 노산군의 뒤를 이어주자는 견해였다. 그러나 원로대신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유보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중종도 반대의견에 합류했다. “선왕께서 하지 않은 일이다. 내가 태도를 바꾸어 노산군의 후사를 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종과 원로대신들의 주장에는 뚜렷한 명분도 이론적 근거도 없었다. 그들은 조광조 일파의 제안을 거부할 만한 실질적인 이유도 대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신중론의 뒤에 숨어, 개혁파의 주장을 꺾었다. 후세의 역사가들 중에는 정광필 등 그 시절의 원로대신을 조광조의 일파로 보는 이가 많으나, 재고할 점이 많다.

그날의 경연 풍경은 조광조 등 개혁세력의 비극적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젊은 개혁가들은 고전에서 배운 명분과 의리를 바탕으로 현실을 바꾸려 했다. 그랬기에 임금의 면전에서 감히 임금의 약점을 고발하였던 것이다. 하나 기득권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원로대신들은 신중론을 지피며, 개혁의 동력을 끊기에 바빴다.

지금 이 나라의 처지는 어떠한가. 정부, 국회 및 사법부의 움직임을 보자. 지난 정권보다는 한결 나아졌다고 하지만, 다수 시민들의 의사에 어긋나는 결정과 공익을 외면한 판단이 아직도 많다. 개혁이라면 고개를 내젓는 기득권층의 악습은 여전하지 않은가.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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