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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권모 | 정치·국제에디터
온갖 사건과 의제가 난분분한 총선 판에서 완벽히 잊혀진 것이 있다. 핵의 문제다. 고리원전 1호기의 전기 공급이 끊겨 가동을 멈춘 중대사고가 난 것이 얼마 전이다. 이중 삼중으로 마련했다는 안전장치, 비상발전기들은 소용없었다. 핵발전소는 전원이 끊기면 냉각이 안되면서 온도가 치솟아 원자로가 폭발하게 된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한 것도 비상발전기가 침수돼 전기를 공급하지 못한 게 직접 원인이었다. 핵발전소는 전원이 차단되면 원자폭탄으로 변하는 것이다. 고리 1호기가 ‘원자폭탄’이 되어 터질 수도 있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것을 한달여 은폐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핵발전의 문제는 이번 총선에서 잊혀졌다.
녹색당 광화문 시위 I 출처:경향DB
한 해 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 때도 그랬다. 가공할 핵 위험을 목도하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핵발전 폐쇄와 축소를 정책화하고, 중국도 핵발전소 신설 계획을 보류했다. 한국만 예외였다. 일본과 원자로 설계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안전하다는 선전과 자기최면으로, 핵발전 문제를 덮었다. 여전히 핵발전소는 녹색성장의 핵심이고, 수출산업으로 대접받았다. 국회에서도 핵발전소의 안전 여부만 운위됐고, 핵발전 정책의 근본적 논의는 시도조차 없었다. 2030년까지 핵발전소를 두 배로 늘리는 계획은 한 치도 수정되지 않았다. 한국은 후쿠시마 사태 이후 핵발전 확대 정책을 고수한 거의 유일한 정상 국가일 것이다.
그랬기에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의 가동을 연장하고, 수명이 연장된 핵발전소의 가동이 중단되고, 그 사실조차도 태연히 은폐했을 게다. 중대사고라는 것은 방사능이 방출되는 정도가 돼야 쓰는 표현이지 가동을 잠시 멈춘 것을 중대사고라고 할 수 없다, 고 강변할 수 있었을 테다.
핵의 공포에 주민들이 고리 1호기 폐쇄를 청원하고, 새누리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부산시의회조차 폐쇄를 결의한데도 정치는 끄떡없다. 핵발전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핵세력의 이해에 충실한 새누리당의 침묵과 미온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민주통합당도 구호적으로 고리 1호기 폐쇄를 얘기할 뿐이다. 그들에게 고리 1호기 문제는 신공항 건설보다도 하찮은 사안인 것이다.
고리 1호기 사고는 이렇게 핵발전이 정치적 문제임을 환기, 확인시켰다.
총선이 끝나고 나면 정부는 고리 1호기를 당연히 재가동할 것이다. 고리 1호기의 폐쇄는 곧 수명이 끝나는 월성 1호기 폐쇄, 그리고 2020년까지 수명이 완료되는 10기의 핵발전소 폐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총선 뒤 벌어질 고리 1호기 재가동을 둘러싼 논란에서, 성장주의 보수 정당이 지배하는 정치는 또 침묵하고 방관할 것이다.
도저한 핵성장주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핵발전의 폐기를 위해 투신할 정치세력, 정치인이 필요하다. 당장에 핵발전 폐기를 실현하기는 어렵더라도 10년, 20년 그 비전과 가치를 밀고 갈 정치세력이 있다면 핵의 위협을 미래세대에게 넘기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희망의 싹을 녹색당에서 본다. 녹색당은 한국 정치에 나온 첫 생태주의 정당이다. 탈핵과 생태, 인권과 평화를 내세운 녹색당은 여성·청소년·비정규직·성소수자 등 소외된 소수자들이 주축이 된 ‘작은 정당’이다. 녹색당은 2030년까지 원전을 완전 폐기하고, 동물에게 생명권을 부여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고, 농민에게 기본소득제를 실시하는 등 기존 정당에서는 볼 수 없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한편으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힘을 모아 미래세대를 위한 정책을 제안하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코자 하는 그들의 도정은 현실정치에서 무력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존 정당들이 외면하고 무시해 한국 정치에서는 실종된 의제들, 지금 여기서의 삶과 공동체의 위기를 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가치와 정책들에 투신하는 녹색당의 씨앗은 소중하다. 탈핵, 소비자 주권, 도시환경, 생활 생태, 에너지 문제, 기후변화, 농업 가치, 소수자 인권 등.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이젠 한국 정치의 밥상에 올라야 할 의제들이다.
녹색당이 기대하는 건 선거판을 통해 녹색의 가치를 전파하고, 탈핵 같은 정책을 추동할 힘을 모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정당투표를 통한 비례대표 의원을 배출하는 것일 터이다. 선거의 경쟁이 양당구조로 가는 경향에서 녹색당의 지지 확보는 지난해 보인다. 3% 정당 지지를 얻으면 녹색당 비례대표 의원이 탄생하고, 2%의 지지를 못 얻으면 당은 해체된다. 엿새 후 총선에서 지역구 투표는 나의 이해와 계급에 맞는 후보에게 하더라도, 정당투표를 통해 기존 정당이 찾지 못하는 길을 비추고자 하는 이 생태주의 등대정당을 초대할 수 있다. 30여년 전 미미하게 창당된 녹색당이 있었기에 독일은 핵발전의 완전 폐기를 국가 정책으로 도입·추진할 수 있게 됐다. 독일 정치에 생태의 가치를 심을 수 있었다. 투표는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한다. 내가 가진 2표 가운데 정당 지지표를 이 ‘작은 정당’에 넣는 것, 이만큼 값있는 미래에 대한 가치 투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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