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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5월이 되었다. 어릴 때는 5월이 마냥 좋았다. 봄 날씨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기념일들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길가에 연등이 나란히 걸리는 걸 보는 것도 좋았고 어린이날에 가족끼리 놀러 가는 것도 좋았다. 커가면서 5월은 점점 부담스러운 달이 되었다. 어버이날과 스승의날에 해야 할 선물을 고민하는 일부터 갖가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기꺼이 하고 싶은 일도 있었지만 주변 눈치를 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도 생겨났다.

공익근무를 갓 마친 2012년 가을, 길거리에서 하는 설문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항목을 다 기입한 후 뒷장을 펴자 직업을 체크하는 칸이 있었다. 잠시 멍해 있었다. 나는 학생도, 직장인도,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공익근무요원도 아니었던 것이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문화예술인에 체크하라고 자꾸 눈치를 줬지만 내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직업은 그것으로 생계유지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시를 써서는 그것이 불가능했기에 나는 끝까지 직업란을 빈칸으로 남겨두었다. 나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즈음 나는 ‘1년’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1년 중 5월에 해당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 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어릴 때는 기념일들이 많다는 이유로 5월을 좋아했지만, 그 어떤 기념일도 나를 위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서글퍼졌다. 내년 5월에는 자신 있게 직업란에 뭐라도 적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도 경기가 어렵다거나 청년실업이 심각하다는 뉴스를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왔다. 조기 대선 때문인지 몰라도 예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축하해야 할 일도 많고 챙겨야 할 기념일도 여전하지만, 탄핵정국 이후 처음 맞이하는 선거라 다들 신경을 곤두세우는 눈치다. 사전투표에 참여한 유권자 수가 1100만명이 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징검다리 연휴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전국 어느 투표소에서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어서 투표율이 높았다는 의견도 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투표를 했다는 점이다. 특정 후보에게 유불리함을 떠나서,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권리를 행사했다는 점이다.

투표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또다시 역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처음으로 한 표를 행사했을 때 정말이지 기분이 묘했다. 내가 드디어 국민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2항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던 순간이었다.

교육제도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휘청댈 수밖에 없었던 수험생 시절, 왜 정작 학생들에게 투표권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표가 사표(死票)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권리는 누려 마땅한 자격이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어쩌면 그 ‘가능성’ 때문에 계속해서 권리를 행사해왔던 것 같다. 정권 심판이나 경제 발전은 권리 행사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다.

얼마 전에야 나는 우리나라에 유권자의날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5월10일이 바로 유권자의날이다. 이날은 1948년 5월10일, 우리나라 최초로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것을 기리고 나아가 선거와 투표 참여에 대한 중요성과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권자의날이 2012년 1월에 제정되었다고 하니, 만약 저 사실을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1년’의 5월 부분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대선일 다음날, 그러니까 당선자의 윤곽이 드러나는 날이 때마침 올해 유권자의날이다. 우리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날인 셈이다. 투표(投票)는 표를 던진다는 뜻이다. 던진다는 것은 다음날을 향한다는 것이다. 대선일 다음날, 우리 모두 유권자로서 스스로에게 축하를 건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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