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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를 목도해야 했던 작년 어느 날, 문득 대통령의 ‘대’를 구성하는 한자어가 궁금해졌다. 크다는 뜻의 ‘大’와 대신한다는 뜻의 ‘代’ 중 하나일 것 같은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사전을 찾아보고는 조금 우울해졌다. 사실 짐작은 하면서도 아니길 바랐던 단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한자어로 ‘大統領’이었다. 번역하면 ‘크게 거느리고 다스리다’라는 뜻이 될 것이다.

나는 <대리사회>라는 책을 쓰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대리대통령’으로 규정지었다. 그것은 우선 그가 최순실이라는 인물의 대리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자신의 몸으로 존재하거나,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거나, 자신의 사유로서 행동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도 올림머리라는 ‘만들어진 몸’을 하고서야 나타났고, 누군가 써 준 연설문을 그대로 읽으며 ‘타인의 감정과 언어’로만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가 최순실의 욕망만을 대리해 왔다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본과 권력의 욕망에 충실했다. 말하자면 시대의 욕망, 그것에 사로잡힌 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보일 수 있는 여러 추태를 모두 내어보였다.

19대 대선 투표일 전날인 8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펼쳐진 서울 광화문광장에 지지자들이 모여 휴대폰 불빛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다. 권호욱 기자

최순실, 그리고 청문회에 소환된 재벌 총수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을 자신들의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냈다. 그들에게 박근혜는 ‘大통령’이 아닌 자신들을 위한 ‘代통령’이었다. 그러는 동안 돈이 오가고, 말이 오가고, 평범한 국민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온갖 특혜가 오고 갔다. 자본과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들이 한 인간을, 그리고 주변의 여러 타인들을 그러한 괴물로 만들었다. 모든 유착 관계를 부인하며 “국민들께 송구스럽습니다”라는 별 의미 없는 말만 반복하던 그들 역시 대리인간이었다. 자신의 몸과 언어와 사유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있음을 청문회에 나와 스스로 증명했다.

박근혜 역시 재임 기간 동안 대리인간들을 무수히 양산해냈다.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국가와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대통령의 국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을 지키겠다며 거리로 나온 일부 지지자들은 대통령과 국가를 동일시했고, 또한 자기 자신을 국가로 믿었다. ‘자신들의 국가’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선 그들은 대통령의 천박한 욕망을 대리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에 더해, 박근혜는 자신의 대리인간이 되기를 거부한 이들의 이름을 적어 나갔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세월호를 추모하는 글을 쓴 소설가를, 상대 후보를 지지한 영화배우를, 시국 선언에 참여한 교수를, 자신의 정권에 비판적 성향을 보인 그 어느 인물들을 ‘관리’해 나갔다. 이처럼 박근혜는 이 사회를 천박한 욕망이 지배하는 대리사회로 만든 대리대통령이었다. 박근혜를 대통령직에서 파면시킨 것은 자신의 몸을 가진,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자신의 사유로서 행동하는 평범한 국민들이었다. 저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갔다. 그 결과 5월의 대선이 치러졌고 문재인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문재인이, ‘大통령’이 아닌 ‘代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대통령은 자본과 권력이나 자기 자신과 주변인의 욕망이 아닌 ‘국민의 욕망’을 대리하는 데 충실해야 한다. 국민을 대리인간으로 만들지 않아야 하고 국민의 대리인간이 될 것을 선언해야 하는 존재다.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의 대통령이라면 그래야 한다. 자신의 몸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국민을 위한 몸으로 나타나며,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동시에 국민을 위해 발화하고, 나아가 자신의 철학으로 국민들과 끝없이 소통해야 한다.

문재인은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대리운전기사가 되었다. 조수석에 앉은 국민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자기 자신이나 41.1%가 아닌 모든 국민을 대신해 운전대를 잡은 그가, 조금 더디게 돌아가더라도 올바르고 정의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박근혜와 같은 무면허 대리운전기사가 등장하지 않기를 더욱 바란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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