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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e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Friend~’로 시작되는 편지의 발신인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놀라지는 마십시오. 2008년 미 대선 때 국제부에 있으면서 오바마 선거캠프의 메일링 리스트에 주소를 올려놓았더니 지금도 이따금 메일이 날아옵니다. 주로 새로운 정책이나 캠페인을 설명한 뒤 ‘Please donate(기부하세요)’로 끝을 맺곤 하지요. 이번 메일의 제목은 ‘Marriage(결혼)’였습니다. 이미 보도된 것처럼 동성결혼 지지 입장을 밝히는 내용이더군요. 오바마 대통령은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공정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믿어왔지만 ‘결혼’이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강한 전통 때문에 이를 동성커플에게 사용하는 것을 주저했다”고 털어놨습니다. 하지만 “동성커플의 자녀를 친구로 둔 두 딸 사샤와 말리아를 보며, 그 친구들의 부모가 다르게 대우받아선 안된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나의 개인적 신념을 밝히기로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동성결혼은 종교·사회·문화적으로 휘발성이 큰 사안입니다. 한국의 보수진영이 기회만 되면 색깔론을 제기하듯, 미국에서 동성결혼 문제는 보수가 선호하는 선거 이슈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보 성향의 오바마가 도박을 했습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동성결혼 합법화 찬성론이 반대론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차이가 크지는 않습니다. 진보세력은 오바마의 발언을 미국 민권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선언으로 평가하는 반면,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불붙은 ‘문화전쟁’이 오바마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동성애자인 미국 남성이 오바마 대통령의 동성결혼 지지 선언을 TV로 지켜보고 있다. ㅣ 출처:AP연합뉴스/경향DB

# “이번 남북 약혼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4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디스는 대한민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로 상향조정했습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드라마 <더 킹 투 하츠>에서 남한 국왕 이재하(이승기)와 북한 여군장교 김항아(하지원)의 약혼식을 전하는 방송기자는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대한민국이 입헌군주국이라는 전제 아래 펼쳐지는 드라마에서 남북 결혼을 추진한 것은 이재하의 형인 선왕 이재강(이성민)입니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소망하는 그는 남북한 장교로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장교대회에 출전시키는 방안을 밀어붙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일팀에서 만난 남남북녀 이재하와 김항아의 결혼까지 추진하지요. 그러나 자신들의 ‘놀이터’인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탐탁잖아 하는 글로벌 군산복합체 ‘클럽 M’에 암살당하고 맙니다. 이재강은 죽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동생 커플의 약혼식 주례를 위한 영상을 미리 녹화해 두었습니다. 그는 예비부부에게 “이 땅의 모든 전쟁 위험을 없애기 위해 솔선수범하며, 불가피한 전쟁 상황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힘을 합쳐 막아내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판타지인 줄 알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며칠 전 영화 <코리아>에서 본 남북 탁구단일팀이 떠올랐습니다. 그 주역인 현정화·리분희 선수가 19년 만에 재회하려 했지만 무산됐다는 기사도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 “진보적인 미국, 보수적인 미국은 없습니다. 흑인의 미국, 백인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습니다. 하나의 미국이 있을 뿐입니다. 불안 속에서도 담대한 희망을 가집시다.”

무명의 주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면서 ‘전국구 스타’로 부상합니다. 그는 넉 달 뒤 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연방 상원에 입성하고, 이태 후에는 자신의 연설 내용을 딴 책 <담대한 희망>을 펴내면서 사실상의 대선 출사표를 던집니다. 다시 이태가 지나고 그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오릅니다. 취임 후 오바마의 국정운영이 지지자들을 만족시킨 것은 아닙니다. 건강보험 개혁안과 재정적자 감축안 등에서 공화당에 지나치게 양보한다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동성결혼 지지를 선언한 것도 등돌린 지지층을 되찾기 위한 승부수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의미를 폄훼할 수는 없습니다. 뉴욕타임스의 표현대로 “오바마의 발언이 결혼권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끝내지는 못하겠지만, 발언 자체로 대단히 큰 상징적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답답합니다. 정치판이 특히 그렇습니다. 사방에서 부정, 부패, 폭력, 불통, 오만, 독선 같은 말들이 들려옵니다. 이럴 때 누군가 꿈을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개헌론 같은 권력자들의 관심사 말고, 담합인지 단합인지 헷갈리는 ‘그들만의 연대’ 말고, 시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담대한 희망 말입니다. 오바마처럼, 이재강처럼 당당하고 용기있게 고정관념에 맞서는 지도자를 보고 싶습니다. 그저그런 잠룡에 머물고 싶지 않다면 정치적 득실이나 현실적 유불리를 뛰어넘어 ‘다른 세상’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에서든 드라마에서든 세상을 바꾸는 힘은 꿈이요, 상상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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