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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드레퓌스’로 불리는 강기훈씨가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얻어내기까지는 24년이 걸렸다. 송사에 한번 휘말리기만 해도 심신이 피폐해지는데 그는 강산이 두 번 바뀌고 대통령이 다섯 번 바뀌도록 수사와 조사, 재판을 거듭해서 받았다.

그의 인생은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중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순간 결딴났다. ‘살인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그해 봄 전국으로 퍼졌고 전남대생 박승희씨 등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이른바 ‘분신 정국’으로 정권과 민주화 세력 간 대충돌이 벌어졌다.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라는 글을 썼다.

5월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간부인 김기설씨가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서강대에서 투신했다. 서강대 박홍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검찰은 분신 배후 세력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전민련 동료인 강기훈씨가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줬다는 이유(자살방조)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노태우 정권은 퇴진해야 합니다’로 시작하는 김씨 유서와 강씨가 써보인 글씨는 일견 비슷했지만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김씨 유서 글씨와 강씨 필체는 동일하다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가 발표되고, 그것이 증거로 인정되면서 강씨는 1991년 7월 구속기소됐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심 유죄, 2심 유죄, 3심 대법원서도 유죄. 민주화 세력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2005년 강씨 사건을 위한 진상규명대책위가 구성되면서 반전이 시작됐다. 재심 청구, 서울고법 재심 개시 결정, 검찰 항고, 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 서울고법 재심 무죄, 검찰 상고, 대법원 재심 무죄라는 한국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일들이 벌어졌다. 자살방조 혐의로 감옥에 갇힌 스물일곱 젊은이는 파렴치범이라는 비난까지 받다가 나이 50이 넘어 누명을 벗었다.

강기훈 사건을 바로잡은 것은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진실화해위는 1991년 당시 검찰이 제시한 필적 감정이 잘못됐고, 국과수가 필적 감정을 문서감정인 한 명에게만 맡기고도 여러 명이 공동으로 감정한 것처럼 법정에서 허위로 증언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럼에도 사법부가 재심을 통해 사건을 결론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죄인은 강기훈이 아니라 사건을 날조한 노태우 정권과 검찰이라고 공식화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이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 됐다.

그러나 대법원 재심은 아쉬운 점이 많았다. 재판관이 “사건번호 2014도2946 피고인 강기훈, 검사 상고를 기각한다”고 낭독한 것이 전부였다. 검찰에 질타도 없었고, 1·2·3심 오판에 대한 반성도 없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병마와 사투하고 있는 강기훈씨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 한마디도 없었다. 대법원 스스로 재판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는 모습이었다.

판결문도 싱거웠다. A4용지 4장 분량의 판결문은 사건번호와 피고인 성명과 주소, 변호인 이름, 대법관들의 서명 등을 빼면 1600자 정도였다. 핵심인 무죄 선고 이유는 형사소송법의 재심 규정과 지난해 2월13일 서울고법이 강씨를 무죄로 본 5가지 근거를 요약·정리한 수준이었다. 한 법조인은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한 느낌”이라며 “이런 판결에 (서울고법의 재심 판결 이후) 1년 넘게 걸렸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일지 (출처 : 경향DB)


당시 수사 검사들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다. 검찰 수사팀 일원이었던 남기춘 변호사는 “현재의 척도로 옛날에 한 판결을 다시 하면 결론이 달라질 것”이라며 “(강기훈씨에게) 사과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임철 변호사는 “검찰은 수사를 하는 기관이지 판단을 하는 기관이 아니다. 당시 1·2심이 진행됐는데 그 과정에서 그런 걸 밝혀내지 못했다면 그건 법원 잘못”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법관의 주관적 판단이 달라지면서 원래와 정반대되는 판결이 나왔다.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재판부마다 다를 수는 있다. 궁극적 진실은 강씨 본인이 아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당시 수사진과 조선일보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일제의 위안부 강제 동원 등에 관해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을 요구할 수 없고, 요구해서도 안된다. 과거 일을 현재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되고, 일제 침략에 선조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도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강씨는 족쇄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강기훈 사건의 사슬에서 풀려나려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오창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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