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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복(被服)의 被는 옷이다. 웃옷 ‘의’와 가죽 ‘피’의 합체다. 한자어 새김(훈·訓)은 ‘입을’이다. 소리(음·音)가 ‘피’니까 훈과 음을 합쳐 ‘입을 피’다. 어릴 적 발음을 착각한 짝꿍이 ‘이불 피’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소 뒷걸음질에 어쩌다 쥐 잡듯 그 또한 정답이었다.

그도, 나머지 녀석들도 몰랐다. 정해진 훈과 음을 외우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被는 옷이기도 하고, 이불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공통의 이름이다. 옷(입는 것)이 被이고 이 단어는 곧 이불(덮는다는 동작)을 함께 가리키게 됐을 것이다. 비유(比喩)가 새말을 만든다.

코트를 휘감거나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이 이 말 被인 줄 알았더라면 주한 美 대사 피습사태를 알리는 기사에 이런 표현이 이렇듯 대거 출몰(出沒)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의 '피습' 현장에 있었던 새누리당 장윤석 의원이 5일 국회 정론관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아무개씨가 리퍼트 대사를 피습했다’는 글이 다급하게 인터넷에 올라왔다. 제일 빨랐던 기사였을까? 그 글을 참고했는지 뒤따른 다른 언론사의 기사 중 상당수가 그 ‘문법’을 그대로 따랐다. 나중에 그 ‘피습’ 중 절반쯤이 ‘습격’이나 ‘공격’으로 바뀐 것을 확인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란 단어 ‘출몰’을 위 문단에서 쓴 이유다.

차라리 ‘아무개씨가 리퍼트 대사를 테러했다’로 쓰는 편이 그들에게는 편하지 않았을까? 영어도 익숙할 것으로 생각되는 언론사 젊은 엘리트들의 이런 황당한 말글 활용사례가 보여주는 바는 무엇일까? 이 상황이 우연이나, 몇몇 기자들의 개인적인(실력 또는 인식의) 문제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다음 사례도 있다.

‘피습당하다’ ‘피습을 받다’는 말, 뜻을 짐작할 수는 있다. 입말로도 꽤 유통된다. 그러나 (영)문법의 피동태(被動態) 피동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색함을 금세 눈치챈다. ‘습격당함’ ‘습격을 받음’이 피습이다. 뜻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자고 권유하면 어린애 취급한다고 서운해할까? 영작하라면 대뜸 ‘… was attacked by …’ 하는 근사한 문장을 내밀 사람들이다.

‘~당(當)하다’는 피동의 접미사다. 마땅하다, 어떤 일을 맡다 등의 뜻으로 우리말에서 쓰임새가 많은 當은 被처럼 어떤 글에서는 ‘시킴을 입는’ 피동의 의미를 만든다. 한자어와 우리말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렇게 ‘역전 앞’ ‘축구차기’ 같은 의미중복의 말이 자주 만들어진다.

신문과 방송의 이런 표현들 때문에 우리 시민들 상당수는 우리말을 자주 잘못 배워오고 있다. 그 영향은 오래갈 것이다. 우리 언중(言衆)들, 어디가 왜 틀린지도 모르면서 어느덧 익숙해진 그 말을 마냥 쓸 것이다. 자녀들에게, 혹은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줄 것이다. ‘글 쓰는 이’의 역할이나 의무를 새삼 떠올려야 하는 이유다.

기자는 ‘피습사태’를 알리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옳은 말과 바른 글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들의 표현은 불가피하게 말과 글의 교과서가 된다. 이번 오류, 얼핏 보아 대여섯 개 언론사 빼고는 거의 모두에 해당되는 얘기다. 바른 말글이라야 바른 뜻을 짓는다. 희미한, 비뚤어진, 부러진 말로 세상 바룰 글을 지을 수 없다.

잊지 않기, 피(被)는 입는 옷이면서 덮는 이불이다.


강상헌 |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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