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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도심 거리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외국인 관광객들과 맞닥뜨린다. 고궁이나 쇼핑몰은 물론 전통사찰 같은 곳을 방문하는 이들도 많다. 사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더러 법당에 들어가 예를 올리기도 하고, 마당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법당 밖 계단에 걸터앉아 쉬기도 한다. 산책길에 나도 가끔 그들처럼 계단에 걸터앉아 쉬는 일이 있다. 얼마 전, 관광객들 옆에 앉아 더위를 피하는데 바쁘게 법당으로 향하던 초로의 여성이 갑자기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외국인 관광객을 향해 높고 빠른 톤으로 한국말을 쏟아냈다.

“아이고, 절에 오면서 이렇게 다 벗은 꼴로 오다니, 이거 가려야 돼, 이거.”

돌아보니 그녀는 벌써 외국인 여성의 어깨에 걸쳐진 스카프 자락을 들어 그것으로 그녀의 가슴께를 덮는 시늉을 반복하고 있었다. 놀란 내가 멈춘 숨을 내쉬기도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재빠르게 토해낸 후 법당으로 들어갔다. 나보다 더 놀란 쪽은 관광객들이었을 것이다. 여성 두 명, 남성 한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크게 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그들을 향해 웃으며 양해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들도 허탈한 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오래도록 나는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다. 우리는 왜 그토록 거침없이 타인의 삶 한가운데로 무자비한 손길을 들이미는지. 늘 남들에게 관심이 많고, 타인을 서슴없이 판단하거나 평가하고, 타인에게 자기 생각이나 신념을 강요하는지.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측면은 타인에게 그런 것들을 들이미는 사람들이 늘 “이게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라는 조건을 붙인다는 점이었다. 한때는 <당신을 위해 하는 이야기>라는 소설을 구상한 적도 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이가 상대에게 자기중심적이고 가학적인 통제의 언어를 쏟아내는 장면을 극단까지 묘사해보고 싶었다.

각설하고, 그 장면을 목격한 뒤 다시 걸으며 나의 외국여행 경험을 떠올려 보았다. 어느 나라에서도, 누구로부터도 그토록 서슴없이 관광객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언어를 들은 경험이 없었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그 나라 국민들이 관광객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가 몸으로 느껴진다. 관광 수입에 많이 의존하는 나라는 관광객에게 친절하고, 그만큼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범죄도 많다. 관광 수입이 국민소득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나라는 관광객을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 그런 나라 국민들은 자기 삶에 몰두해 관광객을 의식할 틈도 없어 보인다. 특별한 시선을 보내지도 않고, 자기 신념을 강요하는 일은 더욱 없다.

우리가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는 이상하게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외국인이라면 무조건 추앙하면서 친절하게 대하거나, 이유 없이 경계하고 폄하하는 것. 한 미국인 정신분석학자의 책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반미 감정이 높다”는 분석을 읽은 일이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원래 의존하는 대상을 사랑한다. 분노 역시 의존하는 자의 특성이며, 원했지만 받지 못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 “외국인 관광객이 점점 늘고 있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은
우리 내면의 감정이 투사되지 않은
편안한 일상 경험이 아닐까”


세계 모든 나라는 국경선을 맞댄 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지만 우리가 주변국들을 부끄러운 언어로 비하해서 부르는 일은 특별히 이상하다. 2001년 처음 중국을 방문해 왕푸징 거리에 섰을 때 선연하게 마음을 지배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나라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자가 되겠구나.” 개혁·개방을 이루어가는 속도나 규모만이 아니었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방식,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태도 등 모든 면에서 감탄할 만한 요소가 보였고 저력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당시 중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 나라를 약간 옆눈으로 보던 태도가. 그것은 현실 검증을 거치지 않은, 다만 내면의 불안을 낯선 대상에게 투사하는 미숙한 태도일 뿐이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보살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늘 의존할 사람이 필요하듯, 내면의 불편한 감정들을 인식하지도 소화하지도 못하는 우리는 그것을 쏟아낼 대상을 필요로 한다. 괴물, 악마, 마녀 등은 중세까지 인간이 내면의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들을 투사해 만들어낸 대상들이다. 저 이상한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는 적과 원수를 만들어내 대규모의 긴 전쟁을 치렀다.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오늘날에는 나쁜 감정을 쏟아낼 대상이 약자와 이방인밖에 남지 않은 듯 보인다.

사실 이방인은 인류의 처음부터 불안을 유발하는 존재였다. 당시 외부에서 오는 낯선 사람은 대체로 침입자였다. 무기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이방인이 들여오는 새로운 문물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흔들곤 했다.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불쾌한 대상으로 만들어 폄하할 필요가 있었다. 불안과 공포를 가리기 위해 근거 없는 편견, 이상한 신념, 강박적 규칙들을 만들어 사회를 통제했다. 우리는 지금도 낯선 이들 앞에서 미미한 불안감을 느끼며, 저 초로의 아주머니처럼 불안을 투사하고 신념을 강요하는 행위를 한다.

외국 여행을 하던 초기에는 한 나라의 국민소득이 그 나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비례하는 듯 보였다. 국민소득이 낮기 때문에 여성에게 돌아가는 기회와 혜택이 적은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비하되고 억압당하는 여성이 키워내는 다음 세대가 어쩔 수 없이 발달을 방해받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한 나라의 도덕성과 국민소득이 비례하는 듯 보였다. 가난하기 때문에 사기, 도둑질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부정부패 행위들이 누적되어 그 사회의 근본 에너지와 추진력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또 다른 생각이 든다. 한 나라의 국민소득은 그 나라 국민들의 자기성찰 역량과 정신적 성숙도에 달린 게 아닐까. 개인의 창의성이나 성취도가 불안을 처리하는 능력에 달려 있듯이 한 사회의 발전 잠재력도 그럴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점점 더 많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있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우리 내면의 감정이 투사되지 않은 편안한 일상 경험이 아닐까.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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