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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부터 사흘 동안 한국상담학회의 연차 학술대회가 있었다. 대학 건물 한 동을 통째로 빌려 여러 강의실에서 세미나, 심포지엄, 워크숍 등이 개최되었다. 주최 측에 의하면 3500명이 등록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독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뉴스를 보기 두렵다. 우리 사회가 대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것은 10여년 전부터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꾸준히 받아온 질문이기도 하다. “치유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사회가 현상적으로는 더 위험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느냐?” 그럴 때마다 나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지금의 이 혼돈은 건강한 사회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불안해할 게 아니라 의미를 이해하면 되고, 낙담할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된다고.

심리치료의 핵심은 양가성을 통합하는 데 있다. 치유 과정에서는 반드시 내면에 억압하고 외면해둔 무의식의 어두운 측면, 아프고 나쁘고 찌질한 모습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자기의 못난 모습을 인정하고, 외면해둔 아픔을 경험하고, 그것까지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는 과정이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는 핵심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자기가 옳고 정당하고 선하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내면 깊이 억압해둔 그 반대 성향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투사하고 있다. 그런 방식으로 자녀를 통제하고, 타인을 판단하고, 자기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더 나빠진 듯 보이는 현상은 지난 세기 동안 억압하고 외면해온 마음의 문제들이 일제히 표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치유 과정에 있다는 방증이다.

새천년이 시작되던 첫해, 명문대 출신 청년이 인텔리전트 부모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우리 사회는 아들의 패륜을 비난했다. 그 후로도 청소년들이 양육자에게 폭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일어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손쉽게 자식들의 불효를 비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을 계기로 우리는 부모 세대의 양육 방식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지금 우리는 부모 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심리적 문제들이 자녀에게 대물림되면서 어떻게 다음 세대를 아프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잘못된 양육에 대해 부모가 자녀에게 사과하기도 하고, 새롭게 부모 역할을 배우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부모가 항상 옳다”는 이상한 신념도 점검하고 있다.

내게는 고등학생인 조카가 있다. 이따금 용돈을 보내주는데 어느 시기에 자주 많은 액수의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고모가 걱정돼서 하는 질문인데, 혹시 선배 형한테 돈 갖다줘야 하는 일 있어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저쪽에서 즉각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그런 일은 없어요. 만약 그런 형이 있다면 정학 맞게 할 수 있어요.” 조카의 편안한 말투에 진짜 안심이 되었다.

왕따나 학교폭력으로 자살하는 청소년들의 뉴스가 터져나오던 시기는 2000년도 중반이었다. 그때는 신문을 펼치기 두려울 정도로 자주 청소년의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 많은 청소년들을 잃고 나서야 우리는 적극적으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카의 대답으로 미루어보면 이제 안심할 만한 안전 시스템이 갖추어진 듯하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부끄러움과 함께 잘못을 인정하고
아프겠지만 구조를 해체해서
재조립할 수 있는 용기가 요구된다”


우리는 10년쯤 전부터 ‘죽음의 문화’와 맞닥뜨려왔고, 누군가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가는 중이다. 희생자가 생기기 전에 미리 성찰하고 개선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에는 한 세기 동안 방치해온 심리적 문제들이 너무나 컸다. 문제가 곪고 곪아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희생되어야만 그쪽으로 고개 돌리고 무엇인가 잘못되었구나 알아차리곤 했다. 희생양이 되는 이들이 언제나 알토란 같은 청소년, 청년이라는 점에 늘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가까운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희생된 청소년들은 정말 천사였을 거야.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상처 부위를 직면시키기 위해, 우리나라가 건강해지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해, 그렇게 돌아갔을 거야.” 이런 생각은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한 환상적 현실 인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고 원인과 함께 우리 사회의 묵은 문제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누군가의 죽음이 있어야만 아픈 곳을 인식하는 관행을 거듭 확인했다. 이런 문제를 떠안은 채 우리는 또 군부대에서 쏟아져나오는 죽음의 문제들과 마주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일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함께 우리가 잘못되어 있었음을 인정하고, 아프겠지만 구조를 해체해서 재조립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이 취한 서로 다른 태도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전범을 가려서 처벌하고, 부끄러운 역사 시설들을 보존하며 반성하고, 철학과 예술의 나라에서 어떻게 히틀러가 가능했는지 지금도 성찰하고 있다. 일본은 전쟁 중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 회피하거나 합리화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왔다. 지금도 나르시시즘적인 국가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 된 지금,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던 두 나라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독일은 유럽 대륙의 정치 중심이며 경제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지켜나가고 있다. 일본은 정치적으로 자충수를 두며 고립되어 가고, 30년에 이르는 긴 경제 침체를 겪고 있다.

우리 사회는 성찰하고 개선하며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 좀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고비를 넘고 있다.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나는 “한 세대쯤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30대, 40대들이 스스로 건강해지면서 자녀들을 잘 키워내면, 그들이 사회 주역이 되는 30년이나 40년쯤 후 우리나라는 안정되고 강인하며 관대한 사람들의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상담학회 연차대회에서 나도 질문을 해보았다. 현장에 있는 이들은 무엇이 가장 힘든지. “점점 어려운 내담자들이 오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다행스러운 현상으로 보였다. 이제는 많이 아픈 사람들도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므로.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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