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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정말?”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상대의 말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 감탄하거나 동의할 때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적어도 나의 용법은 그랬다. 어느날 빵집에서, 빵집 여주인이 자기네는 국산 유기농 밀가루만을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요?” 하고 대응한 적이 있다. 그때 내 마음은 반가움이었다. 밀가루 음식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체 탓에 국산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빵이라면 신체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나온 감탄사였다. 그런데 빵집 주인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럼 사실이지, 내가 거짓말하겠어요?” 문득 톤이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명백히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느닷없이 받아 안게 된 분노에 많이 당황했고, 내가 사용한 “정말?”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우리가 “정말?”이라는 단어를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용법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었고 심지어 영어 단어 “리얼리?”조차 용례가 닮아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정말?”이라는 단어를 감탄사로 사용할 때조차 마음 깊은 곳에는 무의식적 불신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조차 우리가 타인의 말에 대해 첫 번째로 보이는 보편적 반응이 의심인 경우가 많았다. 내 말에 반사적으로 의심 반응을 하는 이에게 “어머, 자기는 내 말을 의심부터 하는 거야?”라고 말해서 상대를 당황하게 한 적도 있다.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은 생애 초기 구강기와 관련이 있다. 엄마의 수유와 양육방식이 안정적이면 아기가 타고난 불안감이 잘 다스려져서 외부 환경이 자신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엄마의 양육이 아기가 소망하고 예측하는 대로 진행된다면 안정감 위에 양육자와 외부 환경에 대한 신뢰감이 생겨난다. 불신감은 아기 내면의 불안감이 적절히 소화되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이고, 엄마의 수유나 양육 방식이 아기에게 안심할 만하지 않거나 예측할 수 없을 때 만들어진다. 미국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성취해야 하는 정신 기능을 발달 단계별로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자율성, 근면성, 친밀감, 창의성 등을 형성하기 위해서, 그 전에 가장 먼저 성취해야 하는 기능으로 신뢰감을 꼽았다.

생애 초기 양육 환경이 훌륭해서 기본적 신뢰감이 잘 형성되어 있다고 해도 성장기 내내 우리의 신뢰감은 도전 받는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건다.

부모 말을 잘 들으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성적이 오르면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약속을 믿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약속 어음이 부도난 경험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심지어 자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부모도 있다. 도서관에 있다고 해도, 친구 집에서 공부한다고 해도 나쁜 상상부터 하며 자녀를 의심한다. 그런 부모의 자녀는 부모에게 맞추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쟁이가 되고, 동시에 의심하는 부모의 습관까지 물려받는다.


▲ “세상을 의심하며 갇혀 지낼 때와 세상을 믿다가 뒤통수 맞을 때,
어느 쪽이 손해인지 따져 보자
인간 본성은 불신에 가깝다지만 신뢰란 기제는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남의 말을 의심하는 성향 외에 성인인 우리가 가진 또 한 가지 특징은 약속을 어기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에 대해 결코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는 점이다. 연인이 사소한 약속을 어길 때에도 머리끝까지 분노하고,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비리나 거짓에 대해 가차 없이 공격한다. 그 치열한 분노와 공격은 상대방이 권위를 가졌다는 전제 조건 때문이다. 전능한 힘을 가진 듯 보였던 양육자가 거짓과 속임수로 자신을 조종했던 시절의 무의식 속 분노가 투사되는 것이다.

유아기 양육 환경이 양호하고, 성장기 부모가 아이를 믿어주며 신뢰할 만한 행동만을 보였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믿을 수 없는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식재료를 판매하는 이들은 식품에 위험 물질을 섞고, 미디어는 늘 폭력적인 사건을 보도하며, 자연 재해는 예측 불허이다. 무의식에 아무런 의심의 씨앗이 없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다. 낯선 지역에서 만나는 사람, 밤길에 스쳐지나가는 사람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이었던 원시시대부터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폭력의 경험과 위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회 공동체를 만들었고 인간은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신용 사회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단어의 뒷면에는 기본적으로 불신 사회가 전제되어 있다. 자연 환경을 관리함으로써 이전의 물리적 위험은 줄었지만 문명화된 자연은 원시 자연보다 더욱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세상과 외부 환경을 믿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삼십대 후반의 한 여성은 자기가 누구인지, 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어 뒤늦게 인문학 강좌나 유명인사의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여러 패러다임으로 인간과 삶을 설명하는 강연을 두루 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어떤 강연도 미흡한 느낌이었고 일상에 조그마한 변화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 강사가 지식을 아끼면서 다 말해주지 않는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았다. 그렇게 1년 이상 시간을 보낸 후 알아차렸다. 자신이 강의실에 앉아서 줄곧 강의 내용을 의심하고 강사의 말을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사에게 시기심을 품은 채 그의 지식을 폄훼하고자 했고, 강사가 권위적이라고 느끼면서 그를 비난하곤 했다. 1년간 고스란히 시간과 열정을 낭비한 셈이었다.

의심하는 마음과 신뢰하는 마음 중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은 의심, 불신 쪽이다.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은 자율성, 친밀감, 창의성 등의 정신 기능과 함께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 가져야 하는 역량이다. 성장기에 그 기능이 형성되지 못했더라도 성인이 된 후 알아차리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새롭게 성취할 수 있다. 그런 다음 한번 계산해보아야 한다. 외부 세계를 의심하면서 자기 신념 속에 갇혀 있을 때 보는 손해와, 세상을 신뢰하다가 뒤통수 맞을 때 보는 손해 중 어느 쪽이 심각한가를. 일정한 공식이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풀이 결과는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르겠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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