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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전 번잡한 거리에서 서명운동이 한창이다. “짐승도 그 짓은 하지 않습니다.” 다른 표현도 있을 텐데. 성소수자 인권단체 회원인 나로서는 내용은 물론 방식도 불쾌했다. 동성애 반대 서명운동이었는데 무조건 볼펜부터 쥐여준다. 가는 길을 막고 강요하길래 “했다”고 말하고 빠져나왔다.
대개 서명운동은 진상 규명이나 피해 보상 등을 주장한다. 그런데 최근 일부 기독교 세력의 동성애 반대는 ‘행위’를 반대한다는 것인지, 동성애자인 ‘사람’을 반대한다는 것인지? 이상한 캠페인이다. 마치 장애를 반대한다, 장애인을 반대한다, 검은색을 반대한다, 흑인을 반대한다는 것처럼 시비를 떠나 문법상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특회(在特會·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라는 일본의 극우단체가 있다. 일본 근대사에서 조선인, 오키나와인, 대만인에 대한 노동 착취와 멸시를 여기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은 대만 원주민을 문명화의 대상으로 보고 “물고기” “생번(生蕃·토굴인)”으로 불렀다.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인과 개(犬)는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인 식당이 있을 정도다. 재일 조선인은 투표권도 없다.
문제는 자이니치(재일교포)가 특권을 누리고 있으며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주로 시위, 건물 난입, 폭행, 혐오 발화를 통해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한다. ‘재특회’는 일본 사회의 최대 약자인 자이니치를 차별하자는 단체가 아니다. 그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으므로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출발했다.
우리의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도 재특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한국의 여성 혐오 현상은 일베가 주도한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의 일자리를 뺏어갔다는 잘못된 인식과 분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별 분석은 사실이 아닐뿐더러(여성은 남성의 일자리를 ‘뺏어가지 않는다’) 실제 일베 사용자들이 혐오하는 집단이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성적 소수자, 특정 지역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복지 정책을 요구하는 부모(‘맘충’) 등 ‘루저’나 복지비용이 들어간다고 간주되는 약자에게 더 적대적이다. 다시 말해 ‘수준 높은 국민’이 못되는 비(非)국민을 “솎아내자”는 인종주의가 내재돼 있다. 지난번 일베에서 활약했던 KBS 수습기자 사건에서 보듯이 ‘중상층’ 사용자가 상당하다. 일베가 공격한 집단 중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조직적으로 반발, 대응했기 때문에 여성 혐오만 돋보인 것이다. 재특회와 마찬가지로 일베는 약자를 비하하지 않는다. 여성처럼 약자가 아닌 이들이 누리는 부당한 특권이 부당하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영화 '암살' 출연자의 얼굴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얼굴 사진을 합성한 ‘일베’ 사진_경향DB
재특회나 일베를 KKK단이나 독일의 신(新)나치 같은 서구의 전통적인 혐오 세력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백인우월주의자는 흑인이나 이주노동자가 특권을 누리거나 지위가 높기 때문에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주장은 ‘진정한’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화)다. 그들의 증오는 ‘논리적이다’. 유색인종이나 이주노동자는 더럽고 무질서하고 머리가 나쁘고 게으르고 우생학적으로 열등해서, 사회를 퇴보시키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월한 자기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한·일 혐오 세력의 “특권 세력이 더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와 서구의 “저들은 열등한 족속이므로 몰아내야 한다”는 상반된 주장이다. 전자는 약자를 강자로 둔갑시키는 반면, 후자는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활동이다.
일베는 보수 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우익 시민사회의 본격적인 등장이 아닐까. 이들이 꿈꾸는 국가는 뭔가 다른 것 같다. 상생을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계급과 성별 관계는 모순이다. 이들의 이해(利害)는 대립한다. 이 때문에 사회는 계층과 성별에 대해서 “평등”을,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관용과 배려(다양성, 동화)”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물론 웬디 브라운의 유명한 지적대로 장애, 인종, 이성애 제도 역시 정치적 모순이지만 자유주의 국가는 이를 관용으로 탈정치화한다. 권리를 시혜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일베는 그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베는 제국주의로부터 전 지구적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가 글로벌 도시 연대가 된 지금, 충격받은 구한말 양반 세력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일베가 시대착오적 집단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원래 시대에 대한 판단은 구성원마다 다르므로 사회 통합을 위해 정부가 나서서 ‘건국 67년’이 되었다고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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