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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위인전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되라’는 뜻으로 학교에서도 권장했다. 위인들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했다. 탄생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공통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이 집안에 하늘과 땅의 정기를 품은 아이가 태어날 것이오’라는 예언을 받는다. 위인의 부모는 본시 선행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허름한 행인에게 물 한 바가지나 밥 한 그릇을 대접한 뒤 예언을 선물로 받는다. 예언을 하는 사람은 알고보니 천하제일의 고승이거나 신선이 현신한 것이다. 위인은 특별한 태몽과 함께 태어나고, 어릴 적부터 비범하다. 또래 아이들이 먹고 노는 것에 집착할 때 아이는 먼 산을 바라보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거나 동무끼리 싸울 때 스윽 나타나 지혜로운 해법을 내놓는다. 효심은 극진하고 남들이 중2병이나 사춘기로 방황할 때 위인은 국가와 집안을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한다.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빨리 커서 위인이 되고 싶었다. 어머니께 태몽을 물어봤다 실망하기도 했다. 왜 나의 태몽에는 여의주를 문 용이 등장하거나 하늘길이 열리며 붉은 해가 집 안으로 내려오는 명장면이 없나 속상했다. 아, 나는 위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인가보다. 그러다가도 빨리 위기가 찾아와 멋지게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위인들은 누구나 한 번씩 나쁜 놈들의 계략에 빠져 위기를 맞지만, 담대하게 이겨냈다. 위인전의 첫 장 ‘태몽과 비범한 탄생’ 편은 쓰기 틀렸으니, 다음 장 ‘고난의 극복’ 편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한국의 위인전이 거창한 태몽과 미화일색의 서술로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최근 ‘박근혜와 무리들’을 보며 이제는 읽지 않는 위인전 생각이 났다. 잘못을 빌고 부끄러움에 몸을 한껏 숙여도 모자랄 사람들이 피해자처럼 굴고 있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들은 지금 자신만의 위인전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1인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현 사태는 거짓말로 쌓아올린 커다란 산”이며 “오래전부터 기획된 의혹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전형적인 ‘나는 악의 무리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위기의 위인’이라는 설정이다. 같은 날 특검에 소환된 최순실씨도 “자유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 손자까지 멸망시키겠다고 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독립운동가 또는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 조작간첩으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 난 이들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다. 그러고보니 박 대통령 측 서석구 변호사는 대통령을 예수와 소크라테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난 극복’ 장면을 쓰고 있다고 믿고 있다.

황당하지만 이런 가정이 아니고서야 그들의 언행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도 힘들다. 청문회에 나와 줄곧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김기춘·우병우·조윤선의 표정은 억울해보이기까지 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선출마를 묻는 질문에 “문 조심하세요”, “길이 막혀 있네요” 같은 발언을 남겼다. 옛날 정치인들의 알쏭달쏭 화법을 흉내낸 답변이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불량품으로 판명난 국정 역사교과서 제작이 교육을 위한 일이며 당장 연구학교에 보급해도 교육에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공분을 자아내는 이들의 뻔뻔함, 여유 있어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는 평범한 사고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들은 잘못을 저질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이런 식으로 위기를 탈출했거나 한 번도 제대로 된 벌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을 정신차리게 해줄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있다. 과장된 위인전 따위에 나오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묵묵히 버텨내는 평범한 시민들의 상식. 그것만이 그들에게 위인전 대신 참회록을 쓰게 할 수 있다.

장은교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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