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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비유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은 맞는 말이다. 이 표현은 이중 잣대나 위선적인 뜻으로 사용되지만 언어의 본질을 정확히 대변한다.

이중적? 말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권력을 행사해서 그렇지, 모든 말은 이중, 삼중,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의 뜻과 의사소통의 내용은 사전(text)이 아니라 상황(context)에 의해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전의 약속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이다. 사전은 사회를 반영한다. 많이 쓰면 등재된다.

단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공론장이 필요한 이유다.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의 의견은 어떤 입장에서 출발했나요? 그 입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요? 의미는 사회적 논의 과정, 화자(말하는 사람)와 청자(듣는 사람) 사이의 힘의 관계에 의한 일시적인 개념이다. 누가 하는 말인가에 따라 성희롱일 수도, 유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다.

대개 ‘아름답고 고상한 단어’는 관념적이어서 타락, 오용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 평화, 인권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도 되도록 피한다. 자유, 평화, 인권은 약자에게만 보장되어야 할 가치이지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일 때 권리들 사이의 충돌로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강자(주류, 서구, 남성, 서울…)가 자신의 주장을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테러이며 테러라고 불리는 저항(폭력)을 초래한다.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누가 약자인가,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부터가 정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통치 세력이 ‘관용을 베풀어서’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다 해도 약자가 곧바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에게 말의 자유를 허락하되 영어로 말하라는 식이다. 성별, 인종, 계급, 지식 자원 등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 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은 성희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에 문제제기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적인 사람들은 목소리 큰 여성들, 이동권을 주장하며 거리를 점거한 장애인, ‘일반인’과 다른 몸 상태의 노숙인 등 마이너리티들이지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갑’들의 권리는 제도로 보장되어 있어서 가시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샤를리 엡도’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사건이 발생한 건물 앞 광장에 모여 있다. _ AP연합


프랑스의 주간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한 나의 질문은 한국인들이 주로 보는 방송은 시엔엔(CNN)인가, 알 자지라(Al Jazeera)인가였다.

나는 다른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아랍어를 공부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이슬람 조롱도 나쁘고, 테러는 더 나쁘다”는 양비론은 양가적이지 않다.

이분법은 하나가 정립된 후, 그 외 나머지 것을 말한다. A와 A가 아닌 것, 이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와 테러라는 야만이다. 누가 옳게 보이는가? ‘양비’는 기울어진 저울을 균형 있게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다. 표현의 자유라는 성격 규정과 이에 따른 논쟁 구조 자체가 프랑스의 시각을 대변한다.

한국 사회가 이 사건에 개입하는 방식은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땅에서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세력은 민간 정부 10년을 “잃어버린 세월”로 규정하고 계몽의 사명에 사로잡힌 “할 말은 하는 신문”들이다. 서민과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매체들은 약자의 이해와 객관이라는 이중 메시지에 스스로 갇혀서, 할 말이 없다. 언어가 없으니 지당하신 말씀만 늘어놓는다.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라고. 네 주장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쓴다고.

프랑스의 사회운동가 스테판 에셀이 말한 대로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는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기존의 언어를 독점한 이들이 더 크게 떠들기 위한 구실이 아니라면, 근본적인 문제는 표현의 자유 보장이 아니다. 표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 이것이 표현의 자유의 전제다.


정의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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