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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충주에 갔다가 문을 닫은 여러 수석 가게를 보았다. 그 앞에 흩어진 돌들이 흡사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었다. 골동가게와 옹기를 파는 상점들도 썰렁하고 마냥 적조했다. 차가운 날씨와 인적이 그친 거리에서 만난 그 풍경이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수석을 수집하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난이나 분재, 골동 수집 등도 그렇다. 하여간 격조 있는 취미들이 빠르게 사라지며 밀려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선인들의 돌 사랑은 유별났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말년의 취미로 수석만 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선비들은 마당에 큰 괴석을 놓아두고 방안에는 자그마한 돌 하나를 갖다 두어 수시로 눈을 맞추었다.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라 그 작은 돌에서 거대한 산의 자태를 헤아렸다. 선인들은 산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자 형상을 지닌 채 굴곡을 이루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 굴곡과 연속됨은 다양하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속에서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숨결이자 밀집된 에너지와 같은 것이고 그것에 의해 어떠한 강요된 형태도 지니지 않는 가능한 모든 형태들이 역동적으로 응고된 것이라고 인식했다. 아울러 산은 치솟으면서도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전진해 나가면서도 자체적으로 응축되며 펼쳐져 나가기에 그 크고 웅장한 산은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모든 생명체를 품고 있는 덕 있는 존재로도 보았다.

이처럼 산과 그 축소된 돌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해서 선인들은 수석을 완상하면서 우주자연의 이치를 헤아리는가 하면 돌이 지닌 미덕을 인간 삶의 궁극적인 덕목으로 끌어안으며 살고자 했다. 돌이 지닌 진중함과 침묵, 장수와 부동의 자리에서 그 무엇인가를 살피고자 욕망한 것이다. 아마도 늙어 침침한 눈으로 돌의 얼굴을 애써 바라보며 자신의 최후의 얼굴을 염두에 두며 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돌에서 각자 어떤 얼굴을 떠올렸을까? 돌은 또한 그림 그리는 작가들에게도 무한한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질로서 환상을 심어주고 환영을 자극했으며 또 다른 존재를 그 돌 안에서 찾아내도록 권유해준 매개였다. 그것은 자연이 만든, 시간이 빚어낸 기이한 형태이자 신비다. 최초의 예술작품인 돌을 통해 사람들은 상상하고 이미지를 연상하는 ‘사유하는 인간’ ‘예술 하는 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작가들에게 돌은 익숙한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있다.

최근 경기도 양평의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한 동양화가의 작업실을 다녀왔다. 돌을 유난히 사랑하는 그는 화면에 검은 돌 하나를 그려놓았다. 수평으로 길게 누운, 평원석을 닮은 까만 돌은 오석과도 같은 단호한 검정의 색과 견고한 물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매우 거칠고 조밀한 표면의 상처, 질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업이다. 돌이 지닌 단호한 물질감이 화면 위에 부착되면서 그림과 조각의 경계가 슬그머니 주저앉고 촉각성을 지닌 까만 돌이 납작한 평면의 화면을 무한한 공간으로 물리면서 돌진하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었다. 순간 그것은 광활하고 막막한 우주공간에 단 하나의 돌이 되어 자기 존재를 극대화하고 있다. 나는 그 돌 그림을 보면서 수석을 완상하는 체험을 떠올렸다.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자 아득한 시간의 흔적으로 인해 이루어진 최후의 얼굴이자 무수한 세월의 시련을 제 몸으로 손수 겪어낸, 치러낸 상처로서의 피부를 간직하고 여기까지 살아온 이력을 지녔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의 축적이 놓여있고 자연의 힘에 의해 창조된, 형언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흔적이고, 인위가 아니라 무위의 소산이다.

돌을 그리는 작가는 그 무위를 인위로 다시 복기한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무수한 기억을 더듬는다. 돌이 지닌 무거운 기억과 시간을 덩어리로, 질료로 구현하고자 한다. 나아가 돌 안에 박힌 정신 하나를 애써 찾는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돌의 마지막 얼굴이고 여기까지 살아남아 이룬 기적 같은 얼굴이다. 우리 모두도 저 하나의 돌처럼 최후의 얼굴 하나를 그야말로 절박하게 만들며 살고 있는 셈이다. 돌 하나에도 그토록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피던 선인들의 시선과 마음이 새삼스럽다. 충주의 어느 수석 가게 앞에서 뒹굴던 돌들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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