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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골집 마당 한편에는 손바닥만 한 꽃밭이 있었다. 나무판때기에 붓글씨로 쓴 아버지의 문패가 반짝거리고 송아지가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지게 작대기를 슬쩍 걸쳐두었던 마당 입구. 그 곁에서 가족들의 발소리를 응원 삼아 채송화, 맨드라미, 분꽃, 칸나, 봉숭아, 코스모스 등이 좁은 땅에서 어울려 자라났다. 식물의 종수는 턱없이 빈약했지만 무성한 잎들로 꽉꽉 채운 꽃밭이었다. 식구들이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사투리를 쓰듯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햇빛을 쬐며 경쟁하는 건강한 생태계. 바닥에 바짝 붙은 채송화는 아래를 담당했고 봉숭아 무리는 조금 높은 공중의 한 귀퉁이를 의젓하게 차지했다. 하늘에서 비라도 오는 날. 꽃들은 고개를 들고 얼굴을 말갛게 씻었고 꽃밭의 모래들도 모처럼 자리를 서로 바꾸었다. 울타리처럼 꽂아놓은 사금파리도 먼지를 씻어내면 엉덩이가 깨끗했다. 비 갠 후 꽃밭으로 가면 통통한 줄기마다 모래알갱이들이 날렵하게 뛰어올라 깨알같이 붙어 있기도 했다.

천마산에 가서 처음 족도리풀을 보았을 때 내 어린 시절의 꽃밭, 그 꽃밭에서 착하게 자라나던 흙 묻은 식물들이 생각났다. 연지곤지 찍고 시집가는 새색시가 일생에 한번 쓰는 족두리. 그 족두리를 닮은 꽃이라 하여 제 이름을 얻은 족도리풀. 흔한 줄기나 대궁도 없이 뿌리에서 바로 잎자루가 올라오고 그 끝에 심장 같은 잎이 한 장씩 달리는 족도리풀. 지면에 딱 들러붙어 있기에 흙과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족도리풀. 시집가는 누이처럼 무슨 부끄러움이 그리도 많은지 좀체 얼굴을 들지 않는 족도리풀. 꽃잎은 없고 꽃받침통으로 땅을 괸 채 주로 숲속의 후미진 응달에서 세상의 고요를 고요히 바라보는 족도리풀. 쥐방울덩굴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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