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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초한 꽃이다. 누가 붓으로 이리 고운 난초를 쳤을까. 백암산의 호젓한 길에서 색깔과 자태에 마음을 홀랑 빼앗겼다. 각시붓꽃, 그 이름을 알고 나선 더욱 그랬다. 이후 도톰하게 낙엽이 쌓인 좁은 능선을 만나면 어디 각시붓꽃이 없나? 궁금한 눈길을 던지기도 했다. 출렁이는 마음도 달랠 겸 인왕산 중턱 석굴암에 올랐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더니 어느새 여름 기운이 물씬하다. 도심에 포위된 인왕산의 야생화들. 진달래가 지더니 철쭉이 피었다. 이제는 붉은병꽃나무가 절정이다. 이 꽃도 곧 매미 소리에 파묻히겠지. 깔딱고개를 치고 오르니 반반한 바위가 있다. 그제까지 창창하던 돌단풍 곁에 각시붓꽃이 한 무더기 피어있는 게 아닌가. 엎드렸다 일어서는데 이리저리 숲속을 누비는 새들의 지저귐. 멀리서 꿩 우는 소리도 들렸다.
송나라 유극장(劉克莊)은 ‘앵사(鶯梭)’라는 시에서, 꾀꼬리가 나무를 부지런히 옮기며 비단 같은 낙양의 봄을 짜낸다고 읊었다. 앵사는 꾀꼬리가 가지에서 가지로 날아다니는 것으로 베를 짤 때 북이 왔다갔다하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는 새를 보고 저런 시상을 건져내는 절묘한 감각에 감탄하다가도 이내 울음에서 번져오는 기막힌 것이 있어 가슴이 먹먹해진다. 석굴암에 오르면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저곳에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그 어떤 감정이 일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우려내는 중. 그래서 그런가. 오늘 인왕산에서 들리는 새의 울음은 비단 대신 슬픔의 피륙을 짜고 있는 듯하다. 붓으로 난초 치듯 각시붓꽃을 그려낸 이가 우리 시대의 민낯을 본다면 눈물로 범벅된 이 천에 무슨 기록을 남길는지. 칼처럼 휘어지는 잎과 꼿꼿한 꽃줄기 끝에 오로지 한 개의 꽃만 피우는 각시붓꽃.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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