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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번씩 내가 근무하는 소방서를 아주 먼발치에서 바라보곤 한다. 사무실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그저 50m라는 공간적 거리를 벗어났을 뿐인데 아주 신기하게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다.

Think out of the box !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일은 의외로 쉽다. 그저 사무실을 벗어나 현장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와 도전과제들을 제시받을 수 있다.

2004년 야심차게 발족했던 소방방재청은 재난의 선제적 대응과 소방의 국제화를 위해 부단히 달려왔지만, 어떤 노력이 그렇게 부족했기에 1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14년 세월호 희생자들의 아픔을 모아 국민안전처가 탄생했다. 더 이상 헛된 희생은 없어야 한다는 온 국민의 염원이 담긴 이 조직은 출생부터 큰 부담을 안고 태어난 셈이다. 거기에다 세계 10위권인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안전시스템을 새롭게 재편하고 확고한 틀을 다지는 일은 크나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일반 가정이 이사를 해도 짐 정리를 마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는 법이다. 하물며 대한민국의 모든 재난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국민안전처가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고 고정관념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미래지향적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는 많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국민안전처는 한 지붕 세 가족이란 어설픈 모양새로 걸음마를 시작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조직 이름만 바뀌다보니 한심스러운 행태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제 겨우 반년이란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출범 초기부터 고위직의 승진파티니 뇌물수수 의혹이니 등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가 하면, 얼마 전에는 안전점검을 나간 국민안전처 직원이 지자체 소속 여성 공무원을 성추행해서 처벌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 건 _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다행히 소방공무원이 연루된 사건은 아니지만, 안전이란 이름을 빌미로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는 국민안전처 직원들의 행태는 참으로 불쾌하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 소방은 아주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아픈 환자에게 골든타임이 중요한 것처럼 국민안전처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대한민국 소방 역시 골든타임을 보내고 있다. 이 황금 같은 시간을 타성에 젖어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게 되면 결국은 소방방재청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따라서 중앙소방본부는 일선 소방본부 및 소방서와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서 대한민국 소방의 당면 현안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짚어보고 소방의 존재가치와 위상이 결코 흔들리지 않도록 차근차근 다져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몇 가지 사안들을 살펴보자. 먼저 중앙소방본부 구성원의 전문성과 역할이 중요하다. 결국 모든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은 사람이다. 따라서 각 구성원들은 분야별 전문가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국민안전처 내부에서도 소방만의 전문성과 차별화를 통해서 안전 분야의 주도권을 이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국제적 감각과 기준을 유지하면서도 우리 실정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5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은 제3차 규제개혁 장관회의 겸 민관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를 주재했다. 앞으로는 과감한 규제개혁을 통해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신산업 창출 맞춤형 규제개선에도 힘을 쏟을 전망이다. 소방도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기계적인 공문생산으로 인한 불필요한 탁상행정을 지양하고 현장에 최적화된 유연성을 발휘해서 실질적인 효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구촌이 일일생활권으로 바뀌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FTA)을 통해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현재 47개국과 FTA를 맺고 있으며, 16개 나라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고, 21개국과는 공동연구를 통해서 FTA 여건을 조성 중에 있다.

가까운 미래에 수많은 해외업체와 인력이 들어오게 되면 지금의 소방정책으로 새로운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2009년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자격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에 가입했지만, 유독 안전 분야에서 만큼은 아직까지도 후진국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의 안전기준과 사례를 참고하는 것도 일정부분 도움은 되겠지만, 안전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누군가를 따라만 가서는 안 된다. 국제적인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세계적 트렌드에 맞추어 대한민국 소방의 여러 문제점들을 새롭게 진단하고 처방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한민국 소방의 미래를 이끌고 갈 가칭 <미래소방 발전위원회>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 소방은 실로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고 있지만, 각 분야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폭넓게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야 하며, 이런 전문가들이 긴밀하게 협업해서 연구하고 미래소방의 발전을 위해 좋은 정책들을 개발해 나가는 C&D(Connection and Development)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소방정책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졸속으로 해결책을 내놓다보니 소위 ‘누더기 정책’이란 오명을 안고 있다. 거기에 현장에서는 소방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잘 협력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있다.

새로운 조직의 명칭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정권은 바뀌어도 전문가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직을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 아울러 어떤 하나의 정책이 효과가 있는지는 단기간에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정책의 연속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여건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2004년에 제정된 안전관리헌장에 보면 ‘우리의 번영은 안전문화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지며, 안전을 위한 노력과 투자는 우리와 후손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직도 이 헌장이 유효하다면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안전문화가 우리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국민안전처가 앞장서야 한다.

지난해 소방방재청을 역사 속으로 떠나보내며 많은 소방인들이 참담한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국민안전처는 잘못된 관행과 고정관념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창의적 혁신을 통해서 빠른 시간 안에 대한민국 소방의 기틀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소중한 골든타임을 잃고 또 다시 표류할 것이 분명하다.

이 건 |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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