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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재난현장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나 현장에 출동하는 사람 모두에게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자 공간이다. 특히, 소방대원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도 구조를 외치는 작은 목소리에 모든 감각을 쏟아 부어야 하므로 쉽게 지치고 절망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대형재난이 발생하면 소방서, 경찰, FBI 등과 함께 현장에 출동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목회자들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재난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 나서서 그들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기꺼이 정신적 지원자가 되어 주는 것이다.

성경에도 믿음을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 재난에 슬기롭게 대처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41장에 보면 애굽의 왕 바로가 믿음의 사람 요셉의 꿈 해몽을 받아들여 흉년에 대비해 미리 곡식을 비축해 놓음으로써 7년 동안의 기근을 잘 넘겨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다는 내용이다.

미국은 사회 요소요소에 기독교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목회자들의 적극적 사회참여를 통해서 공적영역에서의 역할도 확고히 다져가고 있다.

미국국토안보연구소(Homeland Security Studies and Analysis Institute)는 연구보고서를 통해 그동안 많은 재난들이 종교인들의 도움으로 훌륭하게 극복되었다고 평가하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2005년에 발생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와 리타(Rita)를 들고 있다.

이 건 _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하지만 아직도 많은 종교인들이 재난을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테러, 총기사고, 자연재해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수많은 재난 속에서 현장을 누비는 종교인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2010년 미연방재난관리청(FEMA)은 워싱턴 신학대학 그리고 모건 주립대학교와 합동으로 <재난현장에서의 목회자의 역할>에 관한 15개의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며, 이 과정은 향후 미국 전역의 신학대학으로 확대 보급될 예정이다.

커리큘럼의 세부과정은 재난에 대응하는 신학적 토대, 재난의 기본개념 소개, 위험물 종류 및 그 영향, 재난대응시스템, 종교단체의 역할 그리고 종교인들의 소명에 관한 것들이다. 이런 교육을 바탕으로 목회자들은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써 청지기 정신의 실천을 통해 재난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모은다.

또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종교시설은 아주 유용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시민들을 위한 대피소, 음식제공, 응급치료 및 개인위생관리, 정신건강과 영적지원, 보급품 관리, 아동보호소 등의 장소가 되며, 이런 봉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어려운 시간을 견뎌 낼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동안 많은 종교단체들이 재난이 발생했을 때 다양한 분야에서 자원봉사를 해 왔다. 지난 해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진도 팽목항에서는 기독교와 천주교 그리고 불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인들이 합동기도회, 미사, 법당, 분향소 등을 마련해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하지만 정작 재난의 준비단계에서부터 종교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턱없이 부족하다. 기독교만을 예로 들어보면, 대한민국에 현재 약 6만여개의 교회가 있고, 국민의 20% 정도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한 해에만 해도 약 7000여명의 예비 목회자들이 신학대학을 졸업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대학들이 재난과 관련된 학위과정을 개설하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일상을 인도할 예비 목회자를 위한 신학대학에는 관련 과정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미국과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는 대한민국에서 종교인들이 재난이라는 공적영역에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만큼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직 의견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재난에 대해 국가와 종교단체간의 협업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재난관리와 대응이란 관점에서 보면 크나 큰 공백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국가는 재난현장에서의 종교인의 역할에 대한 기본개념을 수립해서 그들의 이해와 참여를 요청하고 여기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참여한다면 재난을 준비하고 대응하며 복구하는 모든 과정들이 한층 수월해 질 것이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지에 대해서는 국가와 종교인들 사이에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종교간 과도한 경쟁으로도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한국사회에서는 종교시설이 대형화, 세속화되어 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비단 교회와 성당 그리고 사찰이라는 공간 안에만 우리가 믿는 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와 협업이 필요하겠지만, 종파를 초월해서 꺼져가는 생명을 하나라도 더 지켜내야 한다는 절대가치에 관해서만은 결코 이견이란 없을 것이다.


이 건 |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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