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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는 사고현장에 제때 도착해야만 한다. 그것은 세금을 낸 국민들에게 마땅히 돌려드려야 하는 소방의 막중한 책무중 하나다.

골든타임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면서 출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꽉 막힌 도로를 역주행 하기도 하고, 좁은 골목길에서는 위험천만한 곡예주행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거기에 속도 모르는 사람들의 성질 급한 재촉이라도 있게 되면 소방차 운전대원은 더더욱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다가 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소방차를 운전한 사람에게로 고스란히 돌아가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달갑지 않은 벌금이거나 징계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지 소방차를 운전한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법에서 정한 책임과 의무를 면제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2014년 미연방 소방국(USFA)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미국에서는 약 1만5000여건의 소방차량 관련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소방대원이 사망하는 비율은 전체 소방대원 순직율의 약 15% 정도다. 이 수치는 스트레스 및 과로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소방대원 순직요인이다.

소방차 사고의 대표적인 유형 다섯 가지는 교차로 무정차 횡단, 후진시 안전요원(유도자) 미배치, 과속, 급속한 회전, 차량 바퀴의 도로 밖 이탈이다. 소방차와 관련된 사고로 1996년부터 2012년까지 사망한 미국 시민들의 숫자는 약 240여명이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소방차가 아이러니하게도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마다 119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여기에 도로 및 교통상황도 수시로 바뀐다.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서울시에서만 해도 한해 평균 24건의 소방차 관련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소방차를 운전하는 것은 소방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소방대원, 각종 장비 그리고 물과 같은 재난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기대에 부합해서 소방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써 소방차의 안전한 출동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조언을 드린다.

이건 _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첫 번째는 숙련된 소방차 운전대원을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교육과정과 실습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 일선 소방서에서는 순환보직으로 인해 소방차 운전대원이 수시로 바뀌어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이 떨어진다. 소방차량 운행 중 사고 발생 시 인사상 불이익을 고려해서 많은 소방관들이 소방차 운전보직을 기피하고 있는 현상도 나오고 있다.

일선 소방학교에서 소방차와 관련된 교육과정이 일부 개설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대부분 단순 조작훈련 정도로써, 소방차 주행을 포함한 충분한 실습을 통해서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실전 훈련장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래서 일부 소방서에서는 자구책으로 관내 운전면허시험장과의 업무협약을 통해서 해당 시설을 빌려 주행훈련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소방차를 운전하기 위해서 운전면허 이외에 각 소방차별 자격증을 별도로 취득하도록 하고 있다. 펌프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Pumper 자격증, 물탱크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Tanker 자격증, 사다리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Aerial 자격증, 그리고 공항 소방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ARFF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해당 소방차를 운전할 수가 있다. 각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이론시험과 실기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매 과정마다 안전운전과 규정 속도 준수는 빈번하게 강조되는 사안이다.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에도 각 주별로 정한 일정시간 이상을 선임 탑승자의 감독 하에 주행평가를 받아서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소방차를 운전해서 현장에 출동할 수가 있게 된다.

두 번째로는 정기적인 점검과 정비가 제때에 이루어져야 한다. 타이어 마모를 포함해서 결함이 발견된 차량이나, 정비가 필요한 소방차가 결코 현장에 출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속한 정비는 필수다. 몇 년 전 독일에서 수입한 벤츠 구급차는 한번 고장 나면 수리기간이 오래 걸려서 비싼 가격에 비해 응급차량으로써 제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이미 수차례 보고된 바 있다.

세 번째로는 출동에 관한 조직문화의 혁신이 필요하다. 소방차 사고로 순직한 미국 소방대원의 80% 정도가 출동 중에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일선 소방서에서는 안전한 출동과 관련한 표준운영절차(Standard Operating Procedure) 또는 지침을 만들어야 한다. 긴급을 요하는 출동과 단순 출동에 관해서도 차별화된 출동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야 한다. 단순출동을 하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소방력의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출동대원들 스스로가 현장에 출동하는 동안 안전을 제일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사거리에서는 반드시 멈춰선 후에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서로 협업해야 한다. 소방차를 운전하는 것은 승용차를 운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소방차의 크기, 무게 중심, 브레이크 시스템, 회전력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데, 결국 소방차 사고횟수는 소방차의 속도에 비례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서 운전하고 규정 속도를 준수하도록 교육시키는 것만으로도 사고율을 대폭 낮출 수 있다.

아무리 숙달된 소방차 운전대원이라고 하더라도 과로, 스트레스, 걱정, 근심, 분노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으면 사고로 연결될 수 있으므로 소방관 스스로도 컨디션을 잘 조절하고 관리해서 자신과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여기에는 주위 동료들의 관심과 배려도 필요하다.

한시가 급한 사고현장에 신속하게 도착하고 싶은 것은 모든 소방관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하지만 빠른 출동만 강조하다가 또 다른 피해가 생겨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결국 소방차가 필요한 곳에 안전하게 도착해서 소방 본연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소방차 운전대원, 안전한 출동문화 확산, 그리고 소방차 길 터주기, 골목길 이중주차 금지, 소방차 출동로 확보, 소방차전용 주차장 주차금지 등 시민들의 협조가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모든 책임을 오로지 소방차를 운전하는 사람에게만 부담 지우는 것은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는 소방차가 결코 오지 않는 것보다는 몇 초 늦더라도 안전하게 도착하는 편이 여러모로 낫다. 과연 누가 의지를 가지고 안전한 출동시스템을 관철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다.


이 건 |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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