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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한 노부부가 평생 모은 돈 4500만원을 일선소방서에 기탁해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일이 있다. 2014년에는 대학생들이 열악한 소방장비의 현실을 보고 ‘힘내세요, 소방관님’이란 프로젝트를 통해 모은 돈으로 119켤레의 소방장갑을 기증하기도 했다.

<소방영웅지킴이> 프로젝트를 10년째 이어오고 있는 한 정유회사는 지난 5월 소방관 부부 70쌍을 제주도로 초청,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휴(休)캠프’를 개최하는 등 소방관들에 대한 사랑의 기부릴레이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기부에 힘입어 일선 소방관들도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또다시 지역사회에 되돌려주고 있으니 선한 마음은 참으로 전염성이 강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후원을 받는 일은 지혜롭고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방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고 가장 어렵고 힘든 곳만을 찾아다니며 수고하고 봉사하는 조직으로써 국민들의 눈에 비친 이미지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2014년 ‘아름다운 옷’이란 제목으로 모 방송에서 방영된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면서 경찰관, 환경미화원 그리고 소방관이 등장하는 이 광고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당신 덕분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든든합니다. 우리 곁을 지키는 숨은 영웅들을 응원합니다”라는 클로징 멘트와 함께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후원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공익광고는 말 그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광고내용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2012년과 2013년 당시 한수원은 다양한 원전비리로 시민들의 지탄을 한 몸에 받고 있을 때였다. 한수원 직원들의 뇌물수수, 원전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한수원 자체소방대원의 마약사건 및 소방차량 기름 절도 사건까지 온갖 비리의 온상으로 대표되는 기관이 소방을 응원한다는 것이 조금 꺼림칙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비리들을 조직의 문제가 아닌 철저한 개인적 일탈행위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그 점에서 필자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한수원은 각종 비리로 얼룩져 실추된 이미지를 만회하고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공익광고라는 매체를 빌려 소방이란 이미지에 살며시 편승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사회의 숨은 영웅들을 응원해 주는 것이 그리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이유다.

이 건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지금의 대한민국은 외형적인 면만 본다면 그럴듯한 선진국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그 실체를 깊게 들여다보면 기본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음에 따른 부작용으로 신음하고 있다. 아울러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급속한 발전 뒤에 감춰진 부작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소위 힘 좀 쓴다고 하는 정치인들, 군 장성, 교수, 기업인 등 오피니언 리더들의 실망스러운 작태가 만연하고 있는 요즈음 소방이란 이미지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만의 소중한 브랜드다. 이 모든 것이 선배 및 동료 소방관들의 노력과 숭고한 희생 덕분이 아니겠는가.

소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아무리 거액의 장학금을 지원해 주고 소방장비를 무상으로 기증해 준다고 해도 이것은 소방만을 위한 미시적 관점에서 판단하기보다는, 소방을 믿고 응원해주는 국민들의 관점에서 후원이나 기부금의 타당성이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기관, 단체 혹은 사람들로부터 불편한 지원이나 협찬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사료되며 소방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음에도 배치된다는 소견이다.

우리 소방은 국민들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조직이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소방관이다. 그래서 이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유독 소방에 대해서만은 국민들의 사랑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장애인 교통문화 총연합회 영암군 지회가 영암소방서에 300만원 상당의 소화기를 기증하면서 안전한 지역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해왔으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아이돌 가수들도 소방관들에게 안전장갑 구매에 사용해 달라며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냥 준다고 다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국민이 믿고 있는 우리 소방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게 후원을 받아서 좋은 곳에 사용해야 할지 국가차원에서의 고민이 필요하다. 소방을 사랑는 사람들로부터의 선한 기부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명쾌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건 | 주한 미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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