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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 뒤쪽으로 재개발을 하다가 수년째 방치된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다. 정용은 그곳을 오르다가 평소엔 보지 못했던 커다란 바위 하나가 길 한가운데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바위는 리어카 크기만 했는데, 절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이 밖으로 나왔는지 아랫부분이 검고 축축한 모습이었다. 이게 왜 여기 나와 있지?

정용은 바위 둘레를 돌아보며 괜스레 발뒤꿈치로 툭툭 윗부분을 쳐보았다. 윗부분은 제법 평평해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정 같은 것으로 계속 내리친 듯 모나고 깨진 흔적이 많았다. 그 길은 정용이 아주 가끔 마을버스 대신 걸어서 알바하는 편의점까지 가는, 말하자면 지름길이었다. 평상시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구청이나 다른 기관에서도 관리하지 않는 듯 산을 관통하는 작은 오솔길을 제외하고는 온통 잡풀과 빈 막걸리병,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닐봉지, 오래된 시멘트 포대 같은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야산의 3분의 1은 터파기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모습 그대로 방치돼 있었고, 잡풀과 소나무에는 회갈색 먼지가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용은 잠깐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요 며칠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대기를 메우더니 바로 그제부턴 날씨가 많이 풀리기 시작했다. 등으로 흘러내린 땀이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진 않았다. 정용은 담배를 피우면서 어제 어머니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어머니는 아버지 혈압이 160까지 올라갔다며, 네가 한번 들렀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 정용은 그 문자를 보고도 아무런 답신을 하지 않았지만, 대신 밤늦도록 잠을 설쳤다. 그러고도 다른 날보다 일찍 잠이 깼다. 그는 자취방 벽에 기대앉아 멀거니 스마트폰으로 포털 화면 메인에 나와 있는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대형교회에서 차명 계좌 수백 개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그는 또 포털 화면 맨 아래쪽에 배치된 어느 늙은 교수의 동영상 강의도 보았는데, 그는 유럽의 식민지배와 제국주의가 상속받지 못한 자들의 울분을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말을 했다. 식민지로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상속에서 밀려난 차남이나 서자 출신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정용은 그 강의를 끝까지 다 보지 않고 중간에서 멈췄다. 그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좀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바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도 더 남아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야산 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 바위, 젊은이하고 상관있소?”

반대편 길에서 올라온 한 남자가 정용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그는 등산화에 등산조끼, 큼지막한 배낭을 멘 차림이었는데, 얼핏 봐서도 60대 초반은 되어 보였다. 그는 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아니요. 저는 그냥 잠깐…”

정용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남자가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럼, 내 일 좀 하리다.”

남자는 배낭에서 굵고 긴 밧줄을 꺼냈다. 롤러처럼 생긴 둥근 막대도 몇 개 꺼냈는데, 대부분 쇠로 되어 있는 거 같았다. 배낭 옆에는 접이식 군용 야삽도 매달려 있었다. 정용은 바위에서 두세 걸음 떨어져 남자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자는 등산조끼를 벗어 빈 배낭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더니, 이윽고 놀랍도록 맹렬한 속도로 야삽을 이용해 바위 아래를 파 내려갔다.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땅은 여전히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바위 아래 흙을 파 내려갔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그의 머리와 이마는 어느새 벌겋게 변해버렸다.

“이게…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죠?”

정용이 같은 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정용은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겠소.”

남자가 허리를 한 번 펴면서 말했다. 그의 목울대 근처로 퍼런 힘줄이 보였다.

“뭔 조화인지 웬 두꺼비처럼 어느 날 아침부터 여기 앉아 있었소.”

남자는 배낭에서 작은 페트병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연한 갈색을 띠는 알 수 없는 물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마셨다. 무언가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온 것 같았다.

“한데, 어르신이 이걸 왜…?”

정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지 않소? 할 일도 없었는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야삽을 들었다. 정용은 그냥 그대로 편의점 쪽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기로 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두 시간도 더 남아 있었다. 정용은 발로 쓱쓱 남자가 퍼낸 흙을 뒤쪽으로 밀어냈다.

“에헤이, 하지 마소. 젊은 사람이 뭐 한다고…”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야산엔 정용과 남자 외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고,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았다. 남자의 야삽 날이 땅속에 숨은 돌멩이와 부딪히는지 가끔씩 쇳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하지 마세요. 이게 무슨…”

정용은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각지도 않은 말을, 마치 웅얼거리듯 내뱉었다. 남자가 일을 멈추고 정용을 돌아보았다. 정용은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이건 몇 명이 달라붙어도 어려운 일이잖아요? 괜히 힘만 뺏기고…”

“허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이런 걸 보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남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다시 땅을 팠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르신 좋아서 하는 일만 하지 마시라구요! 차라리 일을 하고 돈을 버세요! 그 힘으로 다른 일을 하시라구요! 이게 뭡니까, 이게! 다른 사람 마음 불편하게 만들고….

정용은 그렇게 남자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남자 앞에 버티고 있는 바위를 계속 노려보았다. 정용은 그 바위가 먼 후대까지 이 자리에 계속 버티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젊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고, 나이 든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들면서. 정용은 몸을 돌려 반대편 길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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