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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까지 상하차 알바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진만은 곧장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시간은 밤 10시. 함께 사는 정용은 편의점 알바를 나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진만은 라면을 끓여 먹을까 하다가, 추리닝 바지에 점퍼만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김밥천국에 갈 작정이었다. 월급을 받은 날이니까, 오랜만에 ‘스페셜 정식’을 먹을 생각이었다. 경양식 돈가스에 원조김밥이 함께 나오는 ‘스페셜 정식’은 팔천원이었다. 진만은 정용과 함께 일주일에 두세 번씩 김밥천국에서 끼니를 때우곤 했는데, 그때는 늘 짬뽕라면에 원조김밥, 떡라면에 공깃밥 하는 식이었다. 가격은 육천오백원. ‘스페셜 정식’과는 불과 천오백원 차이였지만, 그래도 주문은 늘 그렇게 했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진만은 마음이 가벼웠다.

밤 10시를 넘긴 시간이었지만, 김밥천국엔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두 명이 함께 온 테이블도 있었지만, 진만처럼 혼자 온 사람이 더 많았다. 양복 차림의 사람도 있었고, 교복을 입은 학생도 눈에 띄었다. 혼자 온 사람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밥을 먹거나 밥을 기다리거나, 모두 한결같은 포즈였다. 진만은 알바생이 안내한 대로 야구모자를 질끈 눌러쓴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야구모자 남자 역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만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예전, 진만은 산 중턱에 이층짜리 건물을 짓는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었다. 카페인지 가든인지, 예스러운 기와를 올린 건물이었는데 거기에서 시멘트와 모래를 나르는 일이었다. 산 중턱이어서 당연히 ‘함바집’이 없었다. 오전엔 간식으로 카스텔라와 우유가 나왔고, 점심은 산 아래 한솥도시락에서 ‘도련님 도시락’이나 ‘고기고기 도시락’ 같은 걸 단체 배달시켜 먹었다.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한 10월 초였지만, 오전 내내 시멘트와 모래를 나르다 보면 신발까지 땀범벅이 되었다. 머리칼과 눈썹은 시멘트가 묻어 희끗희끗하고 뻣뻣해졌다. 인부들은 손도 씻지 않고 그대로 공사현장 바로 앞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었다. 진만도 인부들 틈에 끼어 밥을 먹었는데, 그게 좀 불편했다. 며칠 함께 일해서 낯이 익은 인부들은 밥을 먹으면서 계속 참견을 했다. 군대는 다녀왔냐, 고향은 어디냐, 그 김치는 남길 거냐, 등등. 진만은 대답하느라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번은 도시락을 받자마자 약수터에 갔다 온다는 핑계를 대고 건설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등산로 옆 잘려나간 나무둥치에 앉아 혼자 먹었다. 쓸데없는 질문도 없고, 간섭도 없어서 좋았지만, 이번엔 등산객들이 문제였다. 등산객들은 힐끔힐끔 진만을 쳐다보며, 역력히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 중년 여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등산로를 올라오다가 진만을 발견하자마자 ‘에구머니나!’ 소리치기도 했다. 진만은 그날 이후부턴 그냥 하던 대로 인부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야구모자 남자가 시킨 라면이 먼저 나왔고, 곧바로 진만이 시킨 ‘스페셜 정식’도 같은 테이블에 놓였다. 진만이 시킨 ‘스페셜 정식’은 둥근 플라스틱 접시에 돈가스와 원조김밥이 함께 담겨 나왔다.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먹으려던 야구모자 남자가 흘깃 진만 앞에 놓인 ‘스페셜 정식’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시 후루룩 소리를 내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진만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최대한 조용하게 돈가스를 썰었다. 여기 돈가스가 이렇게 컸나. 진만은 처음으로 그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거 좀 조용히 먹읍시다.”

야구모자 남자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오십대 중반의 사내가 말했다. 사내는 정수리가 훤히 드러난 대머리였는데, 술을 한잔 걸쳤는지 얼굴이 불콰했다. 사내 앞에는 짬뽕라면이 놓여 있었다. 라면을 후루룩 소리 내어 먹는 게 문제였는지, 아니면 야구모자 남자 손에 쥐어져 있던 스마트폰이 문제였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다만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 간격이 지나치게 좁았다는 것, 그건 명확했다. 진만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다시 조용히 원조김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에이씨, 별 꼰대 같은 게 다….”

야구모자 남자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대머리 사내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들은 모양이었다.

“너 이 자식, 지금 뭐라고 그랬어? 뭐라고 그랬어!”

대머리 사내가 젓가락을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야구모자 남자도 지지 않고 젓가락을 매장 바닥에 내던지면서 일어났다. 김밥천국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대머리 사내와 야구모자 남자에게로 쏠렸다.

“이 자식이 진짜! 너 몇 살이야!”

대머리 사내가 멱살이라도 잡을 듯 야구모자 남자에게 다가섰다. 야구모자 남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에이 씨발, 조용히 라면이나 처먹지 왜 지랄인데!”

“이 자식이 그래도!”

대머리 사내가 야구모자 남자의 가슴을 툭 밀치자, 야구모자 남자가 진만의 돈가스 그릇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알바생이 ‘꺅!’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대머리 사내는…마치 무슨 분신술이라도 쓰는 사람처럼, 재빠르게 매장 밖으로 도망쳤다. 야구모자 남자는 그런 대머리 사내를 쫓지 않았는데, 그는 다시 툭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했을 뿐이었다. ‘좆도 아닌 새끼가….’ 그는 자리에 앉는 대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알바생에게 라면값을 치르고 김밥천국 밖으로 빠져나갔다.

진만은 그 모든 일을 굳은 듯 지켜보았다. 야구모자 남자가 나간 후,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라볶이를, 비빔밥을 먹기 시작했다. 진만 또한 자신의 ‘스페셜 정식’을 내려다보았다. 돈가스는 아직 채 반도 썰지 못한 상태였다. 야구모자 남자가 손에 쥐었던 나이프는 테이블 위에 사선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진만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그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돈가스를 썰기 시작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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